엄청나게 웃기고, 슬프고, 특별한 이야기!
‘5월 15일, 베이징에서’로 시작해 ‘5월 25일, 중국에서’로 끝나는 열한 통의 편지 속에서 ‘나’와 할아버지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일들을 겪는다. 그들은 뒤로 가는 시계 같은 별의별 시계가 다 있는 시계 박물관을 가보고, 길가에 쫙 깔린 불법복제 DVD도 잔뜩 주워 담고, 넋을 놓고 중국 서커스를 관람하거나, 수천 년 전통의 중국 의술을 터득한 명의(?)로부터 공짜 진료도 받고, 시중에선 구할 수도 없다는 호랑이 발톱이 든 앰풀을 얻고 흐뭇해하거나, 진시황의 유적지인 빙마융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이 모든 에피소드 중 ‘월드 센세이션 리안’과의 로맨스는 감동적으로까지 읽힌다. 이 부분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왼쪽 팔을 잃게 된 사연을 상상으로 재구성한다.
“리안은 죽었다.” 할아버지가 마침내 말했어. “원체 오래된 일들이라, 혹시 내가 지어낸 얘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할아버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어. “손에 잡힐 만큼 뚜렷하게 기억하면 좋으련만, 이해하겠니?” 리안과 작별할 시간은 고통스러울 만치 빠르게 다가왔다고 해. 물론 두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 그래서 그 시절을 기억할 만한 물증이 없는 거래. 연애편지도, 고수머리도, 마른 감자껍질도, 밥을 함께 보냈던 강가의 조약돌도 남아 있지 않아. _194쪽
할아버지는 전신에서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 힘줄과 근육이 끊어지는 것 같았대. 리안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어. “놓으시래요.” 순간 건너편에서 어린애 목소리로 변한 후가 외쳤지. 할아버지도 외쳤어. “절대 이 여자를 놓지 않을 거요.” 곡예사들이 온 힘을 다해 할아버지를 당겼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몸은 여전히 디딤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어. 리안이 다시 그를 향해 외쳤어. “이제 그만 놓으시랍니다.” 후가 통역을 했지. “어차피 자기는 죽는다고요.” “나도 그래요.” 할아버지가 대답했어. _215~216쪽
현실이 버거울 때 우리는 그 버거움을 희석시켜줄 만한 ‘거리’와 상상의 개입이 가능한 ‘자유로운 공간’을 필요로 한다. ‘나’, 키스에게 팔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중국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동시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상상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한 상상, 한 유머 하는 작가 틸만 람슈테트!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 대상과 인기상을 동시에 수상한 그는 47편의 후보작 중 47위를 했어도 만족했을 거라고 겸손한 수상 소감을 전했다. 그 겸손함이 진심이라는 건 그의 소탈한 언어 선택을 보면 알 수 있다. 특정한 작품을 특정한 장소, 실제 사건이 일어났거나 진행 중인 현장에서 썼다고 강조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틸만 람슈테트는 자신의 소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곳에 전혀 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베이징 레터』를 쓸 때 자료 삼아 달랑 가이드북 두 권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한 권은 글씨가 깨알 같고 텍스트도 너무 복잡해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소설 끝에서 밝혔듯 『론리 플래닛―중국편』 한 권만을 참고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그가 바흐만 문학상을 수상한 후 이렇게 묻는 기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람슈테트 씨, 중국에는 정말 가보지 않으셨나요?” “혹시 친할아버지 사진 갖고 계시면 볼 수 있을까요?”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로서도, 독자로서도 저는 유머 있는 작품이 좋아요. 지나치게 진지한 소설은 감동해야 할 부분과 슬퍼해야 할 부분을 너무 빨리 눈치 채게 하거든요. 유머 있는 소설은 그런 것들을 좀더 잘 감춰주죠. 물론 저는 재밌으면서도 깊이 있고, 진지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베이징 레터』는 그의 이런 바람을 이루어준 소설로 보인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이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는 “이거 진짜인가?” 하며 순간순간 판단을 유보하게 되고, 유머와 슬픔으로 빚은 따뜻한 감동과 묵직한 여운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베이징 레터』는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치게 만드는 소설이다. 제때 해야 할 일들, 예컨대 잠자기, 장보기, 영화 약속, 마감일 등을 까맣게 잊게 한다. 독자를 들었다 놓는 이 소설에 한번 빠져들면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다가 한순간 나직하고 다정한 진실에 맞닥뜨리고 만다. _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바흐만 문학상 심사위원들과 독자들은 『베이징 레터』에 한결같은 탄성을 쏟아냈다. “엄청나게 웃기고, 슬프고, 특별하다!” _모르겐포스트
나에게 이 작품은 누구든지 기꺼이 듣고 즐길 수 있는 야외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교향곡이었다. _부르크하르트 슈핀넨(바흐만 문학상 심사위원)
한 권의 소설이 출간되기 전부터 이처럼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현상이다. _벨트 콤팍트
지은이 틸만 람슈테트(Tilman Rammstedt)
1975년 독일 빌레펠트에서 저명한 사회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책에 둘러싸여 자랐으며, 일곱 살 때 페터 빅셀의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다. 영국 에든버러, 독일 튀빙겐과 베를린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지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헤어드라이어’라는 록밴드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소설가로 데뷔했다. 2003년 『축제 앞의 조치들』을 출간했고, 2005년에는 『우리가 가까이 있을게』를 펴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 가운데 특출한 이야기 솜씨로 평단과 독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세번째 작품 『베이징 레터』로 2008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 대상과 인기상(경연에 참석한 청중들이 뽑는 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독일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의 하나인 이 상의 역대 수상작들은 유머와는 동떨어진 ‘진지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지적인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베이징 레터』를 들고 나온 람슈테트의 수상은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게다가 그의 수상은 경연 당시 집필 중이던 『베이징 레터』의 일부만 공개하며 이뤄낸 성과였기 때문에 문학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베를린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옮긴이 박경희
서강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본 대학에서 번역학과 독문학, 동양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프랑크푸르트에서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숨그네』『흐르는 강물처럼』『첫사랑, 마지막 의식』『암스테르담』『백마의 기사』『지빠귀부리 왕자』『파울라 날다』『매머드를 찾아라!』『슬램』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희망』『직선과 곡선』『무진기행』 등 우리 문학작품을 독일어로 옮겼다.
+ 2010년 4월 15일 발행
+ ISBN 978-89-546-1057-5 03850
+ 128*188(양장) | 248쪽 | 10,500원
+ 책임편집: 강건모(redlily@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