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작은 시골 마을 이나무라가사키에는 산책 마니아 아버지와 그의 호기심 많은 다섯 살 아들이 산다. 이웃집에는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40대 독신남과 매력적인 젊은 여동생이 있다. 이들은 특별한 사건 없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주변 자연을 찬찬히 바라보며 산책하고, 다시 이웃과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밤이 오고, 잠이 든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가운데, 각각의 인물들의 가치관과 작은 철학들이 재잘거리는 대화 속에서 빛을 발한다. 일상 속에서 유유자적 흘러가는 그들의 소소한 세상사 엿보기.
속삭이듯 쓰고, 산보하듯 읽으며
시골생활 수다쟁이 소설가와 친해지기
『계절의 기억』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호사카 가즈시는 1995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후 기존의 소설작법과 차별성을 지니는 독특한 문체로 ‘포스트 무라카미’로 불리며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던 작가다. 국내에는 소설에 앞서 소설창작론 한 권만 먼저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계절의 기억』은 줄거리와 감성 위주의 여타 일본소설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색다르게 다가갈 만한 특별한 작품이다.
장소는 도쿄 근교 바닷가에 위치한 이나무라가사키라는 작은 마을. 부인과 이혼 후 외주 편집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중년 남자와 그의 호기심 많은 다섯 살짜리 아들 구이짱이 주인공이다. 이웃에는 가끔씩 구이짱의 놀이상대가 되어주는 미사짱과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그녀의 오빠 마쓰이 씨가 산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남자 애인에게 차였다며 재워달라고 찾아오는 게이 친구 니카이도, 어린 딸을 데리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이사 와서는 전 남편이 집에 도청기를 설치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미사의 친구 낫짱 등의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이 속속히 등장한다. 소설은 잔잔하고 큰 사건 없이 흘러가는 나날의 평화로운 일상을, 소소하지만 은근히 철학적인 등장인물들의 수다스러운 대화에 실어 온화하게 그려낸다. 사물의 개념이 아직 어른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구이짱의 천진하고도 알쏭달쏭한 질문들은 아버지와 주위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철학적인 문제로 발전해 저녁식사 자리에서 논란의 씨앗이 되고, 게이 동성친구의 실연을 계기로 다 큰 아저씨들이 서로의 연애관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 안에서 소리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계절은 어느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로운 위치를 잡고서,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모습을 바꿔간다.
호사카 가즈시 특유의 길고 장황하고도 어딘가 리듬이 느껴지는 독특한 구어체 문장은, 처음 얼마 동안은 낯설고 의아하게 느껴지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입에 익은 친숙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때그때의 상황과 기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주인공의 생각방식 자체가 다름아닌 우리의 일상이란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날마다 “시간이 뭐야?” “종이를 계속계속 반으로 자르면 어떻게 돼?” 하며 어른들은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질문을 던져 아빠를 당혹하게 하는 구이짱의 말을 곱씹는 주인공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다섯 살 아이의 입장에서 세상 사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대단한 것 없는 나날의 일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우주를 품고 있다, 말하기 좋아하고 생각하기 즐기는 등장인물들은 바로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아차 하는 사이 물이 넘치는 것처럼, 갑자기 감동이 흘러넘치는 순간”
『계절의 기억』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주인공과 아들, 거기에 때때로 몇 명이 더해지는 동네 산책 장면이다. 도쿄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근교에 위치해 있지만 별다른 특산물이나 볼거리가 없어 외부인과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는 한적한 마을 이나무라가사키,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그 동네의 실제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이 이 동네에 살고 있어 곧잘 그 집에 방문해 어울렸던 것이 이 소설을 쓴 계기라고 직접 홈페이지에 밝힌 바 있다. 소설 전체에 흐르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이런 집필 배경과 작가의 수더분한 성격이 과장되지 않게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가슴에 담아보았을 계절의 풍경과 그에 얽힌 추억,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일상과 대화가 쌓이면서 어느새 “수도꼭지를 틀어서 그릇에 물을 받는데 그릇이 생각보다 작아서 아차 하는 사이에 물이 넘치는 것처럼 갑자기 감동이 흘러넘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다.
책 속에서
나에게도 마쓰이 씨가 말한 것과 비슷한 기억이 여럿 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끝 무렵에 평소처럼 아침에 정원에 나갔을 때 느꼈던 예상외의 공기의 차가움이라든가, 중학교 3학년 봄방학 때 스키장에서 돌아온 다음날 저녁에 갑자기 발견한 바깥 공기의 따뜻함과 잠잠해진 바람과 늦어진 해넘이와 서향 냄새 같은 그런 전면적인 봄의 기운, 또 스물일고여덟 무렵 실연당한 2월의 어느 아침에 느낀, 세상은 내 실연과 전혀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밝은 아침 햇살 등, 헤아려보면 끝이 없다.
추천의 말
이제 계절은 금방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바뀔 것이다. 구이짱도 언젠가는 글자를 읽고 쓸 줄 알게 될 테고, 미사짱도 언젠가는 이들을 떠날 테고, 나카노나 마쓰이 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니카이도도 언젠가 새 애인을 만들거나 할 테고, 낫짱도 언젠가 일을 구하고 헤어진 남편에 대한 피해망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한 시간이 다른 시간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럴 줄 알기 때문에, 아니 그럴 줄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이, 다만 “언젠가 몇 년이 지나 기억나는 날이 있다면 오늘 같은 날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 계절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_옮긴이의 말에서
아마존 독자평
사건이라는 오브제가 없는 신기한 소설. 이런 소설은 처음 읽어봤다.
요즘 재미있는 책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에게 적극 추천!
´이것만 있으면 밥 몇 공기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독특한 긴 문장, 가마쿠라 마을에 흐르는 따뜻하고도 거대한 시간, 귀여운 등장인물들.
계절이 바뀌어가는 가운데 펼쳐지는 근사한 일상을 무척 조용하고도 사랑스럽게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