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쩌지? 쥘 없이 어떻게 하루를 보낸단 말인가? 그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오직 가죽슬리퍼만 생각하려 애쓰며, 그걸 찾아 작은 방 안을 헤맸다. 욕실을 뒤지며 아무 생각 없이 빨래바구니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심장 박동이 목까지 차올랐다. 죽은 남편의 슬리퍼를 찾는 무의미한 일이 폭발 직전의 그녀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_17쪽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그녀에게 남편의 존재는 삶을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습관과 익숙함의 총체, 일상 그 자체이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그녀는 아무에게도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로 관성의 법칙에 따르듯 일상성을 유지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기로 했다. 갈색 치마와 그 위에 그녀가 직접 짠 녹빛 모직 조끼. 조끼는 가슴 부분이 좀 끼었다. 알리스는 아주 일상적인 하루에 대한 강한 기대에 사로잡혀 뿌리박힌 듯 부엌과 거실 사이 복도에 서 있었다. 그녀는 쥘이 죽었다는 사실을 잠시 까맣게 잊어버렸다. _23～24쪽

이제는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의사, 이웃 혹은 장의사 들이 남편을 챙기기 시작하면, 그녀는 한 시간 안에 그를 잃어버릴 것이다. 영원히. 그러고 나면 그들은 한 시간 안에 그를 집에서 내갈 것이다. 그녀가 사진을 보고 고른 관에 담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_27쪽

하지만 한 가지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다. 매일 오전 열시 정각에 쥘과 체스를 두러 오는 자폐아 이웃 소년 다비드. 어떻게든 소년의 방문을 거절해보려던 그녀는 다비드의 엄마 베아의 부탁을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 다비드를 집 안으로 받아들인다. 창밖을 보며 소파에 앉은 채로 죽은 남편, 자기 세계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폐아 다비드, 죽은 남편을 오롯이 떠나보내기 위해 하루를 같이 있고 싶어하는 아내 알리스. 그들이 긴장 속에서 보내는 비일상적인 하루 동안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삶은 또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는 시간이다. 이는 쥘의 죽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죽음은 그의 시간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알리스는 남편의 “껍데기”(자폐아 다비드는 죽은 쥘 할아버지를 그렇게 지칭한다.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다)를 붙들고 그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남편의 죽은 육체에서 점점 생명의 흔적이 사라질수록 그녀의 기억은 풍부해진다. 그와 함께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말하지 못한 채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의 외도, 잃어버린 첫아기, 아버지에 대한 기억까지. 죽은 사람의 육체는 절차에 따라 ‘처리’되어 산 사람의 세계로부터 빠르게 분리된다. 알리스가 죽은 남편과 함께 보내는 하루라는 시간은 그러한 바깥세상의 질서가 지닌 폭력성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이다. 사건이 집 안에서 전개되는 동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는 설정은 그래서 우연이라 볼 수 없다. 소설 속에서 눈은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차단하거나 지연하는 구성적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눈은 밖에 있고, 안은 따뜻해요.”

소년이 말했다. 그 말이 마치 시처럼 들렸다. _113쪽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다비드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남편의 죽음을 바깥세상에 알리지 않은 채 그의 시체를 집 안에 두고 있는, 객관적으로 보면 섬뜩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처한 알리스의 내면을 동화 같은 따스함으로 채운다.

“밤이에요, 이제 자야겠어요.”

다비드가 자신의 시에 한 줄을 더 보탰다. 그러고는 옆으로 몸을 돌려, 꽃무늬 이불을 귀까지 끌어당기고 침묵했다. _같은 쪽

이어 다비드가 낯선 잠자리에서 던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 한마디는 알리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것은 알리스가 이 두 문장을 시로 받아들이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 하루가 끝나고 휴식의 시간이 왔다는 것. 그리고 낮 동안의 일, 걱정, 스트레스는 창문에 커튼을 치듯 차단해버리고 비워진 몸과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것.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자폐아의 이 한마디는 어떤 정신과 의사의 처방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쥘은 세상을 떠났지만 알리스, 그리고 우리에겐 잠에서 깨고 나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소설은 알리스가 남편이 끓인 커피향을 맡으며 일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다음 날 아침 죽은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면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내 살처럼 익숙하던 남편의 익숙해지면서 삶은 또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다.  

디아너 브룩호번 Diane Broeckhoven

1946년 벨기에의 항구 도시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안트베르펜 왕립 콘서바토리움에서 네덜란드 문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1970년 네덜란드 하렘으로 이주한 후 기자로 활동하며 수십 권의 청소년 책을 출간했고, 벨기에 안트베르펜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1년에 발표한 쥘과의 하루』가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럽의 주요 작가 반열에 올랐다. 한편 이 작품은 독일에서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2000년 삼십 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주요 잡지사에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이진영

연세대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비교문학 박사과정에 있다. 『난 황금 알을 낳을 거야』『외뿔이 사슴 올라프』『날아라 올라프』『꼬마 부엉이 삼총사』『아빠 일어나세요!』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10년 4월 30일 발행 

+ ISBN 978-89-546-1123-7 03890

+ 115*185(양장) | 124쪽 | 8,800원 

+ 책임편집: 강건모(redlily@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