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전 세계 8개국 번역, 출간!
스위스 문단의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 페터 슈탐의 두번째 장편소설
‘체호프와 카버의 뒤를 잇는 문체적 금욕주의자’ ‘스위스 문단의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 스위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페터 슈탐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이런 수사가 따라 붙는다. 그는 대여섯 개의 단어만으로도 사건과 인물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독특한 문체를 가진 작가로 손꼽힌다. 또한 현대인의 고독과 소통의 어려움, 상실과 좌절, 자유와 불안, 행복, 사랑, 죽음 그리고 삶의 덧없음 등 익숙한 문학적 주제를 새로운 감성으로 풀어냄으로써 “교체 불가능한 목소리의 출현”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작가에게 쏟아지는 화려한 찬사에 비해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평범하다. 대단한 열정이나 포부도 없는 그들의 세계는 사소한 일상일 뿐이고, 그들에게 닥치는 사건 역시 대단한 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다. 슈탐의 절제된 문장은 이러한 인물들의 내면을 가장 적확한 언어로 묘사한다. 점차 사라지는 희망과 농도를 더해가는 절망, 사랑과 온기에 대한 기대와 불가피한 환멸, 생이 강제하는 고독과 패배 등이 슈탐 특유의 문체를 통해 ‘건조한 슬픔’이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데뷔작 『아그네스』 이후 3년 만에 발표한 그의 두번째 장편소설 『희미한 풍경』(2001)은 북유럽의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풍광을 배경으로, 생애 처음 북극권 밖으로 나온 스물여덟 살의 여인 카트리네의 정체성 표류기를 그려낸다. 노르웨이 북단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북극권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녀는 두 번의 실패한 결혼에 좌절한 채 자기 삶의 뚜렷한 정체성을 찾아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 중부 유럽으로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난다. 『희미한 풍경』은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전 세계 8개국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슈탐은 이 작품으로 2002년에 스위스 실러 재단 상과 카를 하인리히 에른스트 예술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당신들은 절대 나를 찾지 못할 거야!”
북극광 아래 명멸하는 한 영혼의 쓸쓸하고 희미한 풍경……
스물여덟 살의 세관원 카트리네는 마을 항구에 러시아 선박이 들어오면 밀수품을 조사하러 나간다. 그녀에게는 여덟 살 난 아들이 있지만 별로 세심하게 돌보지 않는다.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녀의 첫 남편은 주정뱅이에 싸움꾼이었다. 그와 이혼한 뒤 카트리네는 자신과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접근하는 토마스, 마을 유지의 아들이자 생선 공장의 임원인 그와 두번째 결혼을 한다. 카트리네의 이런 삶은 작가에 의해 마을 풍경만큼이나 쓸쓸함과 서글픔을 품은 것으로 묘사된다. 카트리네의 삶 자체가 희미한 풍경의 일부인 셈이다.
그러나 카트리네는 마을과 자기 내면의 풍경을 순조롭게 받아들이지만은 않는다. 그녀는 북단 마을의 어둠을 싫어하며 특히 모든 것이 백색에 묻혀버리는 겨울에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녀의 내면에는 자신의 환경 그리고 그 환경 속의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그녀는 무엇인가 결락되어 있다는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카트리네는 희미한 풍경과도 같은 자신의 삶에 어쩌면 토마스가 짙은 획을 그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그와 재혼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강박적인 거짓말쟁이일 뿐 아니라 아내의 삶을 완벽히 조종하려는 마초임이 드러난다. 좀 더 짙은 윤곽을 지닌 삶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의 삶을 원했던 카트리네는 다시금 절망하며, 이런 절망 속에서 소꿉친구 모르텐과 하룻밤 관계를 맺는다. 이 사실을 안 시댁 식구들이 카트리네를 비방하는 편지를 마을 사람들에게 돌리자 그녀는 연안 여객선을 타고 마을을 떠난다.
근무지를 옮길 수도 있을 거야. 카트리네는 생각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야. (……) 피오르 양편의 눈 덮인 암석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배는 그렇게 점점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갔다. _78~79쪽
북극권 아래로 내려가보는 것은 오래전부터 카트리네가 어렴풋이 희망한 일이기도 하다. 북극권의 마을이 짙은 어둠도 밝은 빛도 아닌 회색의 희미한 지대라면, 북극권 아래는 분명한 색채의 지대, 무엇보다 빛의 세계이다. 그러나 덴마크와 독일, 프랑스 그리고 스웨덴을 경유하는 이 여정에서 그녀는 특별한 삶을 발견하지 못한다. 게다가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실마리를 던져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여행을 마칠 즈음 카트리네의 내면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화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무엇보다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위해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그녀는 토마스와 결별한다. 그리고 소꿉친구 모르텐에게서 사랑을 발견한다. 순간적인 북극광의 출현에서 그녀는 어떤 희망을 본다.
오랜만에 보는 북극광이었다. (……) 카트리네가 가만히 지켜보자 넓은 장막이 점점 좁아지고 빛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고는 가는 줄 하나만 남았다. 파르르 떨리는 녹색 광선, 하늘에서 거칠게 똬리를 트는 뱀 한 마리. 나는 행복해. 그녀는 생각했다. _243~244쪽
그녀의 삶은 이제 행복할까? 작가는 카트리네의 새 삶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다음의 마지막 단락처럼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 그리고 둘째 아이를 가졌다. 딸이었다. 이름은 솔베이. 그녀는 모르텐과 함께 주방에 있었다. 점심 값을 아끼기 위해 샌드위치를 만드는 중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주택 임대계약을 했고 나중에는 집을 샀다. 그들은 트롬쇠와 몰데와 오슬로에서 살았다. 랜디는 방학 때 외할머니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었다. 여름이 되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밝았다. _247쪽
슈탐의 독특한 문체로 빚어낸 인간실존에 대한 위대한 엘레지!
『희미한 풍경』에서 우리는 극적인 기복이나 특별한 사건을 발견하긴 어렵다. 페터 슈탐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어쩌면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인물을 선택해서 평범한 사건을 그려나간다. 그럼에도 그는 그 속에서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독자는 독특한 문체로 쓰인 작품이 자극하는 연상과 반성에 의해 빈틈을 채워나가면서 더욱더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평범한 등장인물과 그들의 평범한 세계 그리고 평범한 사건들은 역시 평범하게 불행하고 평범하게 고통을 겪는 대다수 독자들에게 강한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이때의 동질성은 소소한 일상에도 늘 스며 있는 삶 자체의 비극성과 무상성을 분모로 한다.
슈탐은 지극히 건조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냉정한 묘사와 메마른 대화를 구성할 뿐 해설과 주석을 배제한다. 또 이를 통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인간들을 보여주지만, 독자는 오히려 이로 인해 작품이 펼치는 세계와 인물에 매료되는 것이다.
고독과 무상성, 인간실존에 관한 위대한 엘레지! _디 벨트
슈탐은 단 몇 개의 문장으로 장면을 소묘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완전한 상을 심어놓는다. 슈탐의 언어는 아주 간결해서 단순한 문장들이 선율을 유지하면서 이어진다. 그는 단 몇 개의 형용사로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 _디 차이트
걸작이다. 페터 슈탐은 자신의 예술을 칼날 끝까지 몰고 간다.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 사이의 경이로운 인접성을 통해 소설의 시적 매력을 발산한다. _노이어 취리허 차이퉁
● 페터 슈탐 Peter Stamm
1963년 스위스의 바인펠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심리학,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스칸디나비아 등 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1990년 다시 스위스로 돌아와 자유기고가와 방송 작가로 활동했다. 1998년 장편 『아그네스』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그는 소설집 급빙』(1999) 『낯선 정원에서』(2003) 『우리는 난다』(2008)와 장편소설 『희미한 풍경』(2001) 『오늘 같은 어느 날』(2006) 『7년』(2009) 등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고, 라우리스 문학상과 라인가우 문학상, 스위스 실러 재단 상, 카를 하인리히 에른스트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체호프와 카버의 뒤를 잇는 문체적 금욕주의자라 불릴 만큼 건조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글을 쓰는 그는 단 몇 개의 형용사로 극적 요소가 배제된 일상의 풍경을 적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현재 스위스의 빈터투어에서 살고 있다.
● 옮긴이 박민수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해양대학교 인문한국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희미한 풍경』 『책벌레』 『나 이뻐?』『세계철학사』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 등이 있다.
. 초판발행 2010년 6월 28일
. 115*185(양장) | 248쪽 | 값 11,000원
. ISBN 978-89-546-1138-1 03850
. 책임편집 강건모(031-955-2634, redlily@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