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이 책을 ‘당신의 처음’ ‘저마다의 봄’ ‘나와 세상의 조화’ ‘우리의 정착과 방랑’ ‘내 안의 세속과 신성’, 총 5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장 제목들을 가만히 눈여겨보면, 그가 ‘책머리에’에 썼듯, “리허설도 없이 누구나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고 저마다 다른 모습의 봄을 보낸 후 여름에 이르러서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려고 노력하다가 세상 한 귀퉁이에 정착하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멀리 떠나기도,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그렇게 “두루 돌아 결국 자기 안의 세속과 신성을 들여다보며 고요히 생의 의미를 헤아려보”는 우리 인생 여정과 많이 닮아 있다. 클래식 작곡가들이 거쳐 간 삶의 여정을 되짚고, 그들의 혁명과 방황과 행복과 불행에 깊이 교감하면서, 그는 ‘사람’을 들여다보고, ‘인생’을 사색하고, 그럼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던 것이다.
시공과 장르를 뛰어넘은, 위대한 클래식의 숨결
한편 저자는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과 인생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호흡하고 그들의 예술혼을 교감하려 시도한 현대의 연주가들도 함께 이야기한다. 교회에 봉직하면서도 음악은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여겼던 바흐가 교회 합창장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가운데서도 대중적이고 화려한 곡들을 작곡해 자비로 출판, 배급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저자는 바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머리 페라이어를 소개한다.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페라이어는 손가락 염증으로 연주자 생활을 접어야 할 위기를 여러 번 겪었지만 바흐의 음악을 공부하며 위안을 받았고, 2007년 바흐의 파르티타 음반을 내놓아 “연주자들의 테크닉 경쟁이 치열한 메마른 음악세계에 서정적이고 인간적인 페라이어의 연주는 오아시스와 같다”는 평을 얻었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연주’할 것을 청한 바흐의 지시를 제대로 계승한 연주자인 셈이다.
저자는 이렇게 클래식의 옛 거장들의 위대한 정신이 오늘까지 충실히 계승되고 있음을 알리고, 현대 연주자들의 음반을 소개함으로써 그 역사의 흔적을 독자들이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덧붙여 책과 함께 제공되는 음반에는 저자가 직접 고른 8곡의 클래식 연주가 담겨 있는데, 각 장에서 주요하게 다룬 작곡가들의 작품을 담고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공감각적인 독서를 가능케 한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은 작곡가들이 남긴 편지와 저작 등 풍부한 사료를 근거 삼아 정보의 정확도를 높이고 읽는 재미를 배가하는 한편,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도 ‘음악’이라는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시, 소설, 그림 등 현대의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에서 얻은 재료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위대한 클래식 작곡가들의 인생 여정과 그들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사이사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시 한 편을 읽고,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림을 감상하면서 호흡을 고르고 감각의 촉수들을 예민하게 가다듬고 저자의 이야기에 좀더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된다. 클래식을 낯설고 어렵게 느낄 수 있는 독자들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수동적으로 책의 내용을 수용하는 대신 사색하고 상상하고 감상할 수 있게 만드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저자의 자질을 새삼 확인케 하는 지점이다.
또한 각 글이 끝나는 지점에‘유정아의 클래식 노트’라는 팁을 달아, 본문에서 언급했으나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음악 전문 용어나 음악가들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모테트, 카사티오 같은 용어들의 사전적 정의는 물론,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에 숨은 이니셜들의 비밀, 20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우뚝 섰던 두 지휘자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교향곡 레퍼토리 등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프랑스 출신의 유명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늑대 보호센터에서 일하는 것으로 일상이 양분되어 있을 만큼 늑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난데, 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를 일컬어 대단한 존중과 존경을 지니고 대해야 하는 “야생동물”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존경심은 그 대상을 연구하게 하고, 공부가 끝나면 동물은 마침내 스승이 되어 인간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아마도 그 말 없는 스승이 그리모에게 다른 연주자들의 해석에 영향받지 말고, 자기 안의 세계를 담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연주를 완성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저자 유정아 역시 이 책에서는 첼리스트 양성원이 말했듯 ‘빈틈없고 당당한 인상의 아나운서’로서의 모습은 잠시 지우고, 클래식 음악을 대중에 소개해야 한다는 가이드로서의 임무도 내려놓고, 음악에 담긴 사람 사는 이야기와 우리가 내면에 감추고 사는 위태롭고 고독하고 헛헛한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위로하고 있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필자인 나와 독자인 여러분 모드를 위해 절실하게 썼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