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자이자 시인인 김영석이 네번째 시집 『외눈이 마을 그 짐승』을 펴냈다. 개념-사고로 왜곡되지 않은, 직관-느낌으로 전해지는 자연과 내면의 울림을 노래하는 일흔한 편의 시들을 묶은 이번 시집은 동양의 전통적 시정신을 통해 인간 삶의 참다운 뜻을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깊이 있는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텅 빈 공간이 빚어내는 충만함
빈 자리, 빈 집, 빈 구멍…… 김영석의 시들에서 보이는 공간의 이미지는 ‘비어 있음’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빈 공간들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에서 비롯된 상실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잃어버린 것」), “살아 있는 것들” 모두에게 주어진 “제 구멍 속에서 태어나 / 제 구멍 속에서 살다” 가는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모든 구멍은 따뜻하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 빈 공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은 그곳이 시인 그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성찰과 깨달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내 안의 빈 공간, 그 안에서 나는 “내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 그 불빛 안에 홀로 앉아서 / 가만히 나를 바라”보거나(「마음의 불빛」), “외딴 웅덩이에 혼자 내려와 / 희미한 제 얼굴을 비추어보거나”(「낮달」), “내 마음의 하늘에 별들이 돋아나고 / 바람은 허공을 울리며 불어가”는 곳에서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다(「우리 모두 거울이 되어」). 그렇게 가만히 나를, 내 안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사이에 “내가 바로 하나의 길이었”음을, “내 안의 밝음과 어둠”은 “내 안의 길목을 지나가는 / 한갓 만물의 기척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만물이 지나가는 길」). 시인의 이러한 성찰의 모습과 그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비어 있는 공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공간을 채운다.
‘마음의 눈’으로 노래하는 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시 한 편을 읽는 데에도 그 속에 담겨 있는 갖가지 숨은 의미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따져묻게 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의미의 분석으로 인해 시의 진정한 본질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인위적, 지적 조작에서 벗어나 직관으로 ‘몬(物)-몸(身)-마음(心)’을 바라보고자 한다. 머리로 언어를 분해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자연을 감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상(象)을 느끼는 것. 이 시집의 3부에서 시인이 시도하고 있는 ‘관상시(觀象詩)’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기상도(氣象圖)’라는 부제가 붙은 스물한 편의 연작시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풍경을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느낌으로, 직관과 감각을 통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이다.
관상시란 눈에 보이는 것이나 의미만을 가지고 너무 생각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그리고 의미 이전의 보이지 않고 개념화되지 않는 움직임, 즉 상을 느껴보자는 것이다. 상은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느낌이야말로 개념과 달리 모호하지만 가장 확실한 앎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인식론적 측면을 떠나서라도 시적 감동은 물론이고 모든 예술적 감동에 있어서 그 ‘감동(感動)’이란 결국 감각-직관의 느낌과 섞여져 있는 미분된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_「관상시에 대하여」 중에서
시와 산문이 어우러져 만드는 이야기
한편 4부에서는 시와 산문을 결합한 ‘사설시(辭說詩)’ 형식을 통해 새로운 수준의 시적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시인의 계속된 시도가 눈에 띈다. 산문 형식으로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뒤에 시가 이어지는 구성은 시와 산문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더 큰 시적 효과를 낳는다. 느닷없이 등장한 괴승의 종교적 ‘홀림’으로 모두 외눈이가 된 마을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일로 살육전을 벌였다는 「외눈이 마을」이나,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그 짐승’으로 인해 발병하는 ‘언둔갑(言遁甲) 병’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그린 「그 짐승」, 6ㆍ25 당시 사용되었던 포탄 껍데기를 종 삼아 나무에 매달아놓고 하루 세 번씩 울렸다는 「포탄과 종소리」 등 세 편의 사설시는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우화이자 인간의 지식과 언어가 결코 맹신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날카롭게 꼬집는 것이기도 하다.
서문에서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명료한 앎에 길들어 모호한 느낌에 안주할 줄 모르고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일상이 이 시집을 만날 때, 우리의 사유는 밖으로 자연 그 본질을 향해 활짝 열릴 것이고 안으로 자기 내면의 빈 공간을 ‘성찰’이라는 큰 울림으로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 초판발행 | 2007년 11월 9일
* 121*186 양장 | 174쪽 | 7,500원
* ISBN|978-89-546-0429-1 03810
* 담당편집|조연주,최유미(031-955-8865, 3572)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뜨니
문득 한 줄기 바람이 일고
바람이 일어나 흔드니
온갖 바람의 형상들이 생기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