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에서 「매천 황현 초상」까지
조선의 옛 그림에서 얻는 자기 혁명의 메시지
중년 남성은 어떻게 자신을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는가. 골프, 부동산, 차에 대한 욕심 외에 본질적 가치를 돌아보는 도구들로 삶을 채울 수는 없을까? 『나를 세우는 옛 그림』은 이런 물음에 한 가지 답을 건넨다. 이 책의 지은이 손태호는 옛 그림 보기야말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배움과 수행의 과정이라며, ‘옛 그림 수신론’을 역설한다. 지은이가 옛 그림에 빠져든 계기는 이렇다. 30대 중반, 세상살이에 지쳐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던 무렵, 우연히 간송미술관의 전시를 보고는 ‘불필요한 감정을 비우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전국 곳곳의 미술관, 고서화점 등을 돌아다니며 옛 그림을 폭식하듯 감상했고 급기야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들어가 미술학을 전공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애호가에서 전공자로 옮겨 간 이력 덕분인지 지은이의 글은 전문가의 내공이 살아 있으면서도 쉽고, 오주석 선생을 떠올리게 할 만큼 옛 그림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그 애정을 바탕으로 「몽유도원도」에서 「매천 황현 초상」까지 조선의 옛 그림 60여 점의 의미와 작품 창작의 배경을 소개하고, 지은이가 발견한 옛 그림 속 가르침을 기록했다. 김홍도의 「모구양자도」를 보면서 아들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윤두서의 「자화상」과 채용신의 「매천 황현 초상」을 보면서는 중년 선비의 삶과 자세를 본받는다. 또 김정희의 「수식득격」 속 난엽의 가벼움 앞에서는 비우는 것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지은이에게 옛 그림은 “흐트러지고 비딱해진 마음을 바로 세우고 새로운 용기와 각오를 다지는 데 훌륭한 조력자”인 것이다. 『나를 세우는 옛 그림』은 옛 그림으로 삶을 다잡아 온 한 중년 남성의 성장의 기록이자, 동년배에게 주는 권유의 메시지다.
옛 그림을 지기지우(知己之友)로 두는 세 가지 방법
아무리 애정이 있다고 해도 우리 옛 그림을 감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라진 언어와 문화적 장벽 탓에 그림에 가까이 가기 힘들다. 하지만 천천히 공들이고 음미하면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또한 옛 그림의 매력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이런 걸림돌을 넘기 위해 세 가지 관점을 취한다. 바로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기와 회화사의 맥락에서 보기, 내 삶의 맥락에서 보기가 그것이다. 역사적인 맥락과 회화사의 맥락을 살펴 인문학 덩어리인 옛 그림 속 지식을 전하고, 내 삶의 맥락을 살펴 옛 그림 속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김명국의 「설경산수도」를 다루는 장에서는 연담이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야기며, 「설경산수도」를 여느 산수도나 기려도와 달리 보는 이유, 또 그림 속 절절한 그리움을 자기 삶과 겹쳐본 소회가 함께 펼쳐지는 식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언급한 곳에서는 윤선도에서 공재로 이어지는 윤씨 가문의 내력, 정면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쓴 기법, 그림에서 느껴지는 결기와 자신감을 전한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가슴에 만 권의 학문을 갖추었어도 세상은 그에게 학문을 이룰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고사하고 늘 당화가 가문에 미칠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윤두서의 심정이 그림에 비장하게 표현됩니다. 그러나 그 비장함은 서인을 향한 비장함이 아니라 당색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잘못된 세상조차도 초월하려는 의지가 서린 비장함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름대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 왔노라 외치는 소리가 저 형형한 눈빛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_161쪽, 「나는 누구인가」에서
무엇보다 지은이는 위의 세 가지 관점을 통해야만 그림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알아봄’은 조선 후기 대수장가인 김광국이 『석농화원石農畵苑』에서 그림 감상에 있어 최고의 경지로 꼽은 태도다. 화가의 마음과 그림의 의미 모두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 책은 지은이가 그림을 ‘알아본’ 내용에 따라 크게 3부로 나누었다. 1부 ‘절망으로 피워 낸 꽃’에서는 심사정의 「딱따구리」를 비롯해 지은이를 일으켜 세운 그림들을 담았다. 이정의 「풍죽도」에서는 바람에 맞서는 선비의 기개를 엿보고,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는 조선의 이상향을 그리던 안평대군의 꿈을 보는데, ‘위로의 옛 그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부 ‘그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에서는 김홍도의 「황묘농접도」, 허목의 「월야삼청」 등을 소개했다. 대개 굴곡진 삶을 살아간 화가들의 인생과 작품, 이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본 이야기를 담았다. 지은이에게는 ‘거울’ 같은 옛 그림들이다. 3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행복하기를’에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 신윤복의 「월하정인」 등을 다루었는데, 주로 슬픔과 그리움을 화폭에 승화한 작품들이다.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 같은 옛 그림이다.
1부와 2부 끝에는 동양화의 중요한 개념인 ‘준법(皴法)’과 ‘육법화론(六法畵論)’을 서양화의 개념과 비교 소개하여 동양화 입문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옛 그림은 죽비 소리
삶을 돌아보려는 자에게 옛 그림은 언제나 말을 건다
조선의 옛 그림과 우리 사이에는 몇백 년의 시간이 놓여 있지만 그 속에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가 들어 있다. 당시 사람들도 작게는 늙음을 애잔해하거나 벗을 걱정했고, 크게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시대의 방향을 고민했다. 지은이는 이렇듯 다르지만 비슷한 옛 그림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선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헤아려 본다. 그리움, 자신감, 초탈함, 엄격함, 진중함, 설렘, 지극함, 충직함, 사무침…… 이런 마음을 그림과 짝지어 보며 그림에 공감하고, 그 공감으로 자기 삶을 비춘다. 좋은 그림은 거울이자 죽비 소리와 같기 때문이다. 『나를 세우는 옛 그림』은 옛 그림이 세상의 이치와 근본을 깨우치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제가 그림에 위로받았듯이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없는 기쁨이겠습니다. “과거를 체험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재구성하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일”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처럼, 옛 그림 감상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길 바랍니다.
9쪽_「옛 그림을 보는 것을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