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꾼은 이제 그만!
진짜배기 큐레이터와 잘나가는 딜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모든 것
“큐레이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15년 동안 현장에서 큐레이터로 일해 온 지은이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대중화된 것은 아마도 멋진 주인공의 직업으로 큐레이터를 택한 몇몇 드라마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한동안 호황이었던 미술시장 또한 큐레이터가 ‘멋진 직업’이라는 일반의 인식에 힘을 더했다. 9년 전 지은이가 쓴 <어떤 그림 좋아하세요?>라는 책은 멋진 ‘이미지’만 존재했던 큐레이터라는 직업, 그리고 미술계의 실상을 꽤 적나라하게 밝힌 것이었다. 그 책에서 ‘한국에서 큐레이터가 된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한국 미술계의 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밝혔던 지은이가 <큐레이터와 딜러를 위한 멘토링>이라는 책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지나간 세월만큼 좀 더 진중해진 문제의식과 본질적인 대답을 들고서다. 이 책은 위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큐레이터의 실상, 코디네이터
1장에서 지은이는 ‘한국에서 큐레이터로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보여준다. 어느 화랑에서 전시가 열린다는 상황을 설정해두고,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순서대로 나열한 내용은 그 멋진 명칭에 가려진 실체를 제대로 보여준다.
전시가 결정되면 계약서를 작성하고, 작가에게 자료를 받고, 평론가에게 평문을 의뢰하고, 카탈로그를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편집자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광고를 짜고, 우편물을 발송하고, 기자 간담회를 준비한다. 실제 전시 준비에 들어가서는 전시장에 작품을 디스플레이하고, 개막식을 준비한다. 전시가 무사히 열리고 나면 미술잡지에 실릴 프리뷰와 리뷰 기사를 요청하고, 전시가 끝날 때까지 작품 판매를 위한 영업도 한다. 전시가 끝나면? 아직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작품이 무사히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신경 써야 한다.
큐레이터란 이 수많은 일들을 다 관장하고 실행하고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직업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뿐이라면 뭔가 허전하다. ‘큐레이터’라는 멋진 명칭은 실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큐레이터로 일한다는 것’의 대략적 실체이다. 어떤가? 그럴듯해 보이는가? 굉장히 다양한 일들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전시’라는 이벤트를 진행하는 일이다. 하나의 이벤트를 진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는 ‘코디네이터’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따라서 전시 작가의 구성과 기획에 대한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 화랑의 큐레이터는 전시 코디네이터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런 업무는 1,2년 정도 ‘구르다’ 보면 어느 정도 이력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하는 ‘큐레이터’가 화랑주 입장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고급 인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좀 더 싼 임금에 부릴 수 있는 대체 인력은 넘칠 만큼 많다. 쳇바퀴 도는 일에 지쳐 스스로 나가떨어지든 혹은 좀 더 고분고분하고 싼 인력을 찾는 오너가 새로운 인력으로 갈아치우든 손쉽게 그리고 순식간에 대체되는 것이 바로 허울 좋은 ‘큐레이터’의 실상이라고 봐도 좋다. 그렇다면 ‘코디네이터’에서 벗어나 ‘진짜배기’ 큐레이터, ‘잘나가는’ 딜러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대로 된 큐레이터/딜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연장들’
화랑에서 살아남기 위해 첫 번째로 갖춰야 할 ‘연장’으로 지은이는 바로 외국어를 꼽는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야 어느 분야에서 도움이 안 되겠는가. 하지만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았다고, 외국 유학 경험이 없다고 지레 겁먹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큐레이터/딜러로 일하면서 필요한 외국어 실력은 네이티브 스피커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결정적인 것은 핵심적인 몇몇 사항에 대한 실무적인 협의”이기 때문이고 “얼마나 능숙하게 말하느냐보다는, 무엇을 말하느냐가 훨씬 중요”하기에,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만 가능하다면 유학의 경험이 이점이 될 수는 있어도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국어 능력이 있어도 활용할 자세를 갖추지 못한 경우, 콘텐츠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훨씬 큰 문제라고 지은이는 꼬집어 말한다.
두 번째로 갖춰야 할 ‘연장’은 작품 판매 능력이다. 사실 ‘작품 판매’야말로 화랑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큐레이터’ 직을 선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잘 판매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영업 스마일을 얼굴에 띄우고 고객에게 친절하게 봉사하면 될까? 혹은 앵무새처럼 “싼 가격에 나온 인기 있는 작품이고 앞으로 값이 더 오를 것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면 그만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작품을 잘 파는 큐레이터/딜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자질은 생각보다 ‘내것’으로 만들기 어렵다. 여기에 비하면 외국어 능력을 갖추는 게 쉬워 보일 지경이다.
세일즈의 기본은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면 프로페셔널 딜러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적어도 ‘왜 이 작가의 이 작품을 권하는가’ 그리고 ‘이 가격은 적정한가’라는 두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없다면 섣불리 그림을 고객에게 권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지은이는 충고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전문 지식을 쌓고 가격에 대한 정보를 늘 좇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이 다루고 있는 작가별로 가격 리스트를 작성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신만의 작업들은 가격의 변동 속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작품을 추천할 수 있게끔 함으로써, 딜러의 전문성을 인정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화랑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딜러가 가장 많이 접하고 다루는 작품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이다. 즉, 아직 미술사적인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작품이어서 ‘권위 있는 전문가의 평가’에 기댈 수 없다는 얘기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세 번째로 갖춰야 할 ‘연장’이다. 실은 이것이 지은이 이 책에서 진짜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이다. 지은이는 큐레이터/딜러가 갖춰야 할 세 번째 연장이자 가장 핵심적인 경쟁력은 바로 ‘안목’이라고 이야기한다.
외국어 능력은 한정된 기간에 쏟아 부은 노력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이니 뒤의 두 가지 ‘연장’에 비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두 번째 연장인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객관적 데이터의 확보 또한 방법과 패턴을 파악하고 익숙해지면 오래지 않아 소기의 진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연장인 ‘안목’만큼은 만만치가 않다.
흔히 안목을 키우려면 ‘많이 봐야 한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무조건 많이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많은 작품을 많이 보면 확실히 ‘취향’은 생긴다. 이것은 진정한 안목을 키우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리고 이 단계를 넘어서면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판별할 수 있을 정도의 안목이 생길 수 있다. 그저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는 수준에서 벗어나, 내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왜 좋은 작품인지 알 수 있게 되는 단계가 바로 이것이다. 작품의 조형성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동시대 미술에서 ‘새로움’을 보여주는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하면 알아볼 수 있을까. 바로 이 새로움을 간파해내는 능력이야말로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는 자질일 테니 말이다. 여기서 해답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 즉 미술사를 공부하라는 것이다. 개별 작품의 가치와 위상을 판별할 수 있으려면 ‘역사’, 즉 미술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습득한다는 것은 시각 조형예술의 전체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개별 시대의 특수성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미술사를 익힌다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고 금세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단기간에 취득할 수 있는 지름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미술계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절대 없다. 한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리하여 미술사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작가들을 다루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여겼을 때에는 현장에서 일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무지로 인한 착각이었다. 사실 당시의 내 업무는 ‘코디네이터’로서의 업무가 전부였으므로, 그런 것쯤 몰라도 하등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력의 소모적 순환구조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제대로 하기를 원한다면,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에 일조하고 싶다면, 미술사를 공부하라.”
이 세 번째 연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는 동안 세월이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네 번째 연장이 필요하다. 안목을 키워가는 동안에 불완전한 안목을 보완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연장은 바로 작품에 대한 객관적 정보 수집과 데이터 연구이다. 안목을 키워감에 따라 이 수집한 데이터들이 좀 더 유기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연장은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미술 전문가로서 사명감을 갖고 컬렉터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함으로써 컬렉터를 ‘교육’시키는 일까지가 ‘진정한’ 전문 미술 인력으로서 큐레이터/딜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럼으로써 현재 그리고 미래의 미술문화에 일정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좌충우돌 경험을 후배들이 답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썼다.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미술 전문 인력이 되고자 하는 후배들이 좀 더 빠르게 정도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