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이현 알랭 드 보통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정이현과 위트와 지적 성찰이 결합된 글을 쓰기로 유명한 알랭 드 보통.
연애의 미묘한 감정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한국의 여자 작가와, 현대 도시인의 일상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스위스 작가.
이 둘이 만나서 ´사랑´ 이야기를 써내려가면 어떤 형태의 책이 나올까, 하는 물음에서 <사랑의 기초>는 시작되었습니다.
2010년 4월 2일 :
두 작가에게 제안서를 보내다
2010년 4월 8일 from 알랭 드 보통
"안녕하세요. 알랭 드 보통입니다. 저의 에이전트를 통해 한국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정이현 씨와 함께하는 공동 프로젝트 제안을 받았습니다. 무척 들뜨고 흥분되어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매력적인 소설가와 함께 평소 써보고 싶은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자체만으로도 무척 즐거운 일이 될 듯합니다."
2010년 4월 23일 from 정이현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 단지 테마뿐이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글이 서로 다른 언어, 문화, 사회적 배경 속에서 나오는 만큼, 수많은 차이가 눈에 띄겠지요. 그리고 다양한 차이를 아우르는 공통점은 결국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키워드를 가지고 픽션을 쓰면 어떨까 합니다. 키워드는 어떤 책의 한 문장, 사물, 노랫말이나 영화에서 따올 수도 있고, 서로 상대의 작품에서 키워드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요."
2010년 5월 14일 from 알랭 드 보통
"저는 1995년 3번째 소설인 <키스&텔>을 발표한 이후로는 줄곧 에세이를 써왔습니다. 물론 저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우리는 사랑일까> 역시 스토리에 충실한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에선 벗어나 있긴 합니다. 그래서 제 소설들엔 ‘에세이적 소설essayistic noble’이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아마도 이번에 이현 씨와 함께 픽션을 쓰게 되더라도 저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형식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1993년 첫 소설을 발표한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지금 저에게 가장 와닿는 테마들을 픽션의 틀에 담아보는 일은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제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은 영국 런던에 살고 있는 어떤 남자가 될 겁니다. 이현 씨의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 서울에 살고 있는 여성이 되겠지요?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각각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으로 나눠 쓰는 것은 어떨까요?"
2010년 5월 24일 from 정이현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러브스토리 중 남자의 시선을 보통 씨가, 여자의 시선을 제가 쓰는 아이디어가 화제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기획의 책이 출간된 몇몇 사례들이 있어요. 대개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 속한 작가들의 공동 작업이었거나 작가들이 서로 친분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에 비해 저와 보통 씨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적 차이도 크지만, 작품의 스타일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하나의 서사를 각각 남자 버전, 여자 버전으로 나눠 쓰는 게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울뿐더러, 그렇게 썼을 때 과연 얼마나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2010년 6월 from 정이현
"작가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저에게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사건이 될 수 있겠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개성과 스타일이 다른 두 작가가 함께 쓰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각자 원고지 500매 분량으로 경장편을 쓰는 건 어떨까요? 동일한 주제 아래 각자 쓰는 옴니버스 소설 같은 것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고요. 보통 씨께서 소설을 쓴다면 어떤 주제를 선택할지 궁금합니다."
2010년 6월 from 알랭 드 보통
"저와 이현 씨의 가장 뚜렷한 작가적 공통점은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 대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 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으며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가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늘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메인 테마 역시 이미 절반은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결혼, 양육, 가족. 이것이 우리가 지금 쓰고 싶고 또 잘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후 두 작가는 시놉시스를 교환하고 원고 집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초고 탈고 후 2011년 여름, 서울에서 대담을 갖고 서로의 원고에 대해 의견을 나눴어요. 그리고 수정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사랑의 기초_ 연인들> <사랑의 기초_ 한 남자>로 독자 분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2. 민아와 준호, 2012 서울
82년생인 준호와 84년생인 민아, 두 사람은 여느 대한민국의 이십대들처럼 소개팅 자리에서 첫만남을 갖습니다. 사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별다른 기대 없이, 그저 주선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남을 약속한 카페로 향하죠. 두 사람 모두 아련한 첫사랑에 아파도 해보고, 이미 몇 차례 다른 사랑도 해보았습니다.
"만 스물일곱의 민아는 1번의 자리에 오랫동안 첫사랑이라고 의심 없이 믿어온 이름 대신 빈 괄호를 그려넣는다. 비어 있는 그 여백을 검지의 지문으로 문질러본다. 무언가 아련한 향기를 머금은 실絲로 한 시절이 봉합된 기분이다. 나쁘지 않다. 2번부터 차례대로 그녀는 헤어진 연인의 이름들을 써본다. 그녀의 펜이 4번에서 멈춘다. 아직은 편치 않은 이름이 거기 있다." 「당신과는 다른 이야기」
아마 다들 민아처럼 가끔 지나간 사랑들을 곱씹어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과연 ´연애의 종착점´은 어디일까요?
만약 결혼을 연애의 종착점으로 선언한다면, 그 전까지의 수많은 사랑들. 첫번째 사랑이나 두번째 사랑, 그리고 최근에 이별한 사랑은 무의미한 것들이었을까요?
<사랑의 기초_연인들>은 바로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아닌, 바로 지금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행복한 해피엔딩이 아닌, 어떤 사랑의 시작부터 소멸되기까지의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어요.
준호가 가만히 민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었다. 누가 왼손이고 누가 오른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별은 높이 반짝이고 봄꽃들이 뿜어내는 향내는 아스라했다. 귓가에 종소리가 잘랑거리는 밤, 저 우주 만물 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밤, 봄밤이었다. 「기적의 비용」
민아와 준호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공통점을 발견해 나가면서, 그들은 여러 우연의 일치들을 하나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연애가 될지도 모르겠다고요. 그 동안 숨기려고만 했던 가족사에 얽힌 비루한 면면들까지 낱낱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고 말이죠. 하지만 관계가 어찌 그리 쉽기만 하던가요.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급하게 몰아닥친 태풍은 어느새 그쳤고, 그 후에는 폭풍우가 쓸고 간 해변을 서서히 수습해가야 한다. 「당신과는 다른 이야기」
이들의 ´기적 같은 사랑´은 세 번의 계절을 함께하는 동안 서서히 일상이 되어갑니다. 상대를 향한 시선이 자신의 판타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포물선이 한 지점에서 만났다가, 다시 다른 방향으로 엇갈려 날아가는 것. 정이현 작가는 이 과정을 때로는 바닐라향처럼 달콤하게, 때로는 가슴 아프도록 서늘하게 묘사했습니다.
이쯤에서 알랭 드 보통의 감상평 한 소절.
알랭 드 보통 : 민아와 준호는 자신들의 감정을 한 점 의심 없이 사랑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실체적인 감정이라고 믿지만, 그들이 실천하는 사랑 어디에도 ´열띤 로맨티시즘´이 없다는 점에서 <연인들>을 낭만주의적 연애소설의 허구를 폭로하는 ´로맨스 없는 로맨스소설´이라고 보았습니다.
3. 벤과 엘로이즈, 2012 런던
"그들은 결혼해서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운명을 예감하고 결혼에 성공한 한 여자와 한 남자. 과연 그럼 그들은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기만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기초_한 남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벤과 엘로이즈는 거의 결혼 10년차가 다 된 부부로 두 아이들과 함께 런던 북부에 살고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늘 상대를 관찰하기만으로도 바빴지만, 이제 둘 사이엔 상대가 눈 앞에서 옷고름을 풀고 있어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그런 권태로움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을.「사랑의 본질」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낭만적 사랑의 콩깎지가 벗겨지고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해피엔딩 뒤에 펼쳐지는 일상이라는 ´리얼리티의 세계´를 가감 없이 그려냅니다. 벤의 하루하루는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직장에서 지친 하루 일과를 마치면 또다시 ´아빠옷´으로 갈아입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줘야 하고, 한번씩 주말엔 놀이공원 나들이에도 나서야 합니다. 그러다 별 것 아닌 사소한 이유로 엘로이즈와 다투고 또다시 미안해 하며 사과합니다. 아아, 사람 성격이 왜 이럴까요? 벤은 한탄합니다. 마치 인간은 "생리식염수속의 변덕스런 자아"와 같다고요.
그렇다면 애초에 사람들은 결혼을 왜 하는 걸까요?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답게 그는 결혼을 ´브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생산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재를 가차 없이 심판하는 시스템 속에서, 더구나 이처럼 종교를 저버린 시대에 우리의 정신이 버텨낼 수 있으려면 비물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다른 평가방식이 절실해진다. 그 보루마저 없다면 심판의 위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우리의 내면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가정의 필요」
그러던 중 벤은 일로 만난 이십대의 젊은 여인 베키와 외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하이힐과 빳빳하게 다린 파란색 셔츠, 회색 순면 속옷, 라이크라 소재의 팬티, 매끄러운 허벅지와 탄탄한 근육. 이런 것들이 촉발하는 에로틱한 감정은 알람브라궁전의 타일이나 바흐의 <B단조 미사곡>만큼이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을 거부하는 행위 역시 일종의 배신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부정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을 우리가 정말로 신뢰할 수 있을까? 「윤리」
처음에 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려 합니다. 결혼을 하면서 서로에게 백프로 완벽함을 기대하는 건 애초에 잘못된 가정이라고요. 하지만 외도를 계속할 생각도 없습니다. 베키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버리는 순간, 그녀 또한 그의 일상에 속하면서 모든 짜릿함과 쾌감은 사라지고 말 테니까요.
그리고 벤은 생각합니다. 엘로이즈와 싸우기도 하고, 실수로 외도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결국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요.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듯 사랑도 배워야 하는 무엇이라고요.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평범한 삶을 위한 용기」
하루하루를 제대로 살아가는 일. 어쩌면 이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요?
정이현 선생님 감상평도 빠뜨릴 수 없죠.
정이현 : <한 남자>는 사랑을 확신하고 마침내 결혼에 이른 두 남녀에서 출발하는 작품이죠. 그래서 사랑보다는 결혼이 전면으로 부각되어 있어요. 아름다운 로맨스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믿은 사랑, 그 후의 이야기랄까. 달콤한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무대 뒤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블랙코미디 같은 작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