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오와 유키코의 여행은 우에노에서 후쿠시마, 야마가타, 닛포리... 북으로 남으로 서로 계속된다. 그러나 여행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다. 실종된 유키코를 찾는 기사들이 신문을 도배하고, 결국 둘의 고난에 찬 여행은 아켈라의 ‘체포’와 모글리의 ‘보호’로 막을 내린다. 직전까지 동지로, 가족으로 함께 걷던 둘은 피해자와 피의자로 분류되어 헤어진다, 소녀는 아무 일이 없던 것마냥 다시 도쿄로 돌아간다.
그리고 40년이 지난다. 모글리였던 유키코는 모든 것이 아련하지만, 그때 도쿄로 돌아온 유키코를 사정 청취하던 형사가 한 말을 기억한다. “그 녀석이 자기를 미쓰오라고 하던? 녀석은 미쓰오가 아니야.” 그래서 유키코는 미쓰오를 미쓰오로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저 ‘그 사람’이라고 해놓고 보니, 모든 기억은 더 불분명해진다. 이제는 그 일이 정말 있었는지조차 희미하다.
우리는 같은 피!
정글의 법칙을 절대 잊지 마라!
아켈라와 모글리가 꿈처럼 방황한 패전 직후 일본 땅은 마치 정글과도 같다. 가난과 배고픔은 기본이요, 카오스 그 자체였다. 제 살길이 겨워 팍팍한 시절이기에 두 미성년의 여행에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거나 따뜻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두 아이가 우산 없이 비를 맞고 다녀도, 설사에 지쳐 쓰러져 있어도, 어른들은 울타리가 되어주기는커녕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만큼 아켈라와 모글리는 더 단단하게 뭉치지만 열차도둑으로 오인 받아 쫓기기도 하고, 간신히 도망쳐 배에 숨어들기도 한다. 그들은 입국을 거부 당한 전염병 환자들을 싣고 표류하는 인양선과 직장에서 낙오된 자들을 태우고 탄광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다. 작가가 아켈라와 모글리의 여행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전후 간난신고의 시절, 그 슬픔의 시절의 풍경이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야성적 본능들이 꿈틀거리고,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지배되는 세계에서 표류하는 소년과 소녀의 여행을 따라가며 우리는 전후 일본사회를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나는 지금도 그의 진정한 이름을 모른다.
소년은 정말로 늑대였던 것일까...
『웃는 늑대』의 모티프인 늑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작가는 늑대는 근대 일본이 잃어버린 고고한 무엇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오늘의 사회를 한 꺼풀 벗겨보면 패전 후의 정글 같은 모습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단지 콘크리트 빌딩으로 덧칠해졌을 뿐, 현대사회는 표피만이 바뀐 회색 정글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소년과 소녀의 고난에 찬 여행에 자연스레 마음을 놓고 이입되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회색의 정글을 사는 우리도 아켈라와 모글리이기 때문에. 소년이 늑대로 불리는 그 잃어버린 무언가라면, 소녀는 잃어버리고 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존재의 상징이다. 모글리가 늑대의 본연을 온전히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의 아이였던 것처럼, 유키코는 이제는 볼 수 없는 고고함을 가진 순수한 무언가의 본질을 목격하고 접속한 최후의 증인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시 어머니의 시간으로 돌아온 소녀의 기억은 점점 스러져간다. 개인의 기억이란 결국 꿈같은 것일 뿐. 그렇지만 유키코는 40년이 지난 잿빛 정글에서 말한다. 나는 옛날 어느 적에 웃는 늑대를 만났다고. 명백히 존재했고 목도했던 과거가 사적 기억으로 소멸되면서 오해로 가득한 편견으로 이식되고, 결국 그렇게 구성된 이미지가 고착되는 오늘에 대한 안타까움에 조심스레 항거를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늑대는 ‘악역’으로 태어났다.
“유럽에서, 일본에서 늑대가 자취를 감춘 뒤, 늑대는 전설로만 남았다.
늑대를 본 적이 없는 아이들도 『빨간 두건』이나 『늑대와 일곱 마리 새끼 양』 같은 유럽 동화에 친숙해져 악역인 늑대를 그래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_본문에서
『웃는 늑대』가 발표되고 작가가 ‘늑대라는 동물을 좋아해 그와 관련한 장편소설을 기획하게 되었고, 그래서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늑대라는 상징이 소설 전체를 끌고 나간다’고 언급했던 만큼,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늑대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서두를 장식한다. 목축을 주업으로 삼던 유럽과 달리 어업과 농업을 주업으로 삼던 일본에서는 늑대가 멧돼지로부터 수확물을 지켜주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일본에 총기가 유입되고 사슴 사냥 등이 성행하면서 먹이가 떨어진 늑대가 가축을 공격했고, 결국 늑대는 해로운 동물로 부각되어 결국에는 멸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편견이라는 것이 이 소설을 쓴 쓰시마 유코의 이야기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제 우리는 야생에서는 늑대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항상 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했던 쓰시마 유코는『웃는 늑대』에서도 역시 유랑아들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멸종된 늑대라는 상징을 우회적으로 들려준다.
쓰시마 유코는 대학시절 문단에 발을 들인 이래, 다무라도시코문학상 이즈미교카상 여류문학상 노마문예신인상 가와바타야스나리문학상 요미우리문학상 무라사키시키부문학상 등 다수의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고,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아라비아어, 중국어 등으로 10여 개국에서 번역,출판되어 국내외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의 중요 작가이다. 쓰시마 유코는 작품 못지않게 작가 개인사로도 널리 회자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 다자이 오사무는 그녀가 한 살이었을 때 자살을 했다. 아버지 다자이 오사무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에 대한 쓰시마 유코의 마음속 곡절은 짐작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소설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웃는 늑대』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키코 아버지의 떠들썩한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라는 설정은 엄마가 아닌 다른 애인과 동반 자살한 아버지를 둔 작가의 개인사를 오버랩시킨다. 이와 같은 독서는 쓰시마 유코가 작가의 삶을 사는 한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리대학 국립 동양언어문화연구소에 초청되어 일본 근대문학을 강의하는 등 해외 교류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쓰시마 유코. 그녀는 한국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신경숙, 한수산 등 한국 작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쓰시마 유코의 장편소설을 읽게 된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까. 어떤 기회에 나와 그는 국경을 넘나드는 서신교환을 일 년 동안 했었다. 그의 편지를 읽는 시간이 새벽일 때가 많았다. 한통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신새벽의 내 책상 앞에 앉아 작가로서의 나 자신을 돌이켜보곤 했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자리에서 오히려 침착하게 다시 사유를 시작하는 과장됨 없는 리얼리스트였다.
한 달에 한 번, 열두 통의 편지를 받는 동안 나는 그를 작가로서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인간으로서도 손을 잡고 싶은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내가 일본어를 해독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단편소설밖에 읽을 수 없었던 아쉬움을 『웃는 늑대』 를 읽으며 해갈할 수 있었던 건 개인적으로 큰 기쁨이다. 서로 보호하고 보호받는 『웃는 늑대』 속의 두 아이들을 대면하는 동안 쓰시마 유코는 일본이라는 나라, 현대나 전통, 문학적인 어떤 문법이나 인칭에도 갇히지 않고 소수자를 향해 사투의 언어를 뽑아내는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오락적인 의미의 일본소설이 즐비한 가운데, 독자들에게 뒤늦게 찾아온 쓰시마 유코의 작품 세계는 현재 일본 현대문학의 참다운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이정표가 돼주리라 생각한다. _신경숙(소설가)
전대미문의 주제와 방법,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문장이
이 문학적 모험을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 _이노우에 히사시(소설가)
일본문학이 한국에서 시민권을 얻은 것은 오래전 일이지만, 깊은 울림과 폭을 갖춘 그녀의 작품이 그다지 소개되지 못한 것은 뜻밖이라는 생각과 함께 아쉬움을 갖는다. 그녀의 더 많은 작품이 우리 독자에게 소개되기를 희망한다. _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