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원리와 사상의 의미를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까지 서양 정치사상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정치사상사와 정치철학의 멋진 결합! 사상사 읽기로 현실의 문제에 맞선다
이 책은 2,500년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입체적인 사상사 통사다. 정치사상사에는 ‘고전’(classic)이라 부르는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고전이란 단지 ‘오래된 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해 부단히 읽히며 언제나 참조 대상이 되는 텍스트야말로 참된 의미의 고전이다. 그런 면에서 정치사상사란 곧 고전을 줄기차게 읽어온 역사다. 이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정치사상사의 전통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고전을 읽고 거기서 얻은 관점이나 사고법으로 자기 눈앞의 현실에 맞서는 일이다. 정치사상사 연구가 현대 정치의 양상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연결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정치사상사 연구에서는 고전의 위치에 있는 문헌에 대한 정밀한 독해, 그리고 그 고전이 쓰인 시대상황이나 사회배경을 이해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 없이 고전에서 읽은 것을 눈앞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 든다면 시대착오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정치철학에서 논하는 여러 테마나 개념이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정치사상사 속에서 어떻게 등장했고 또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탐색한다.
정치적 사유의 역사를 돌아보며 정치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정치의 본질에 대한 반성적 물음은 언제나 필요하다. 정치란 무엇인가? 올바른 정치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의 최고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가치에 따라 우리의 공동체를 조직해나갈 것인가? 그런데 정치의 본질에 대한 사유는 역사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우리 시대의 질문들은 정치사상사로 불리는 정치적 사유의 발자취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역사 속에서만 비로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조리 있게 정리했다. 고대의 플라톤을 포함해서 현대의 한나 아렌트 같은 주요 사상가들뿐 아니라 민주주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등의 주요 사조들도 저자 특유의 관점으로 새롭게 짚고 있다. 중요한 인물이나 테마에 대해서는 별도로 자세히 소개한다. 추가적인 ‘독서 안내’도 충실하다.
인간에게 정치사상사는 결코 마를 길 없는 앎의 원천이다
이 책은 정치사상사의 주요 논점들을 알기 쉽게 정리한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 우노 시게키는 특유의 철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서구의 정치사상사를 개성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저자는 정치사상사를 다루는 자신의 관점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정치사상의 역사를 특정 이념이나 가치의 자기발전으로 단순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사상사는 주요 사상가들이 쓴 고전들과 치열하게 대결해온 복합적 과정이다. 그래서 이념적 틀로 역사를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성립에 이어 그 고전의 해독과 그것을 통한 현실과의 대결, 그리고 다시 고전과의 대결, 나아가 이 대결을 통한 새로운 고전의 저술 등으로 이어지는 역동적 과정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둘째, 글로벌 히스토리 시대에 걸맞은 정치사상사 서술을 의식하는 한편, 유럽 중심의 서술에 따른 지역성과 보편성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에 주목하면서 사상사를 전개해나간다. 셋째, 정치사상사와 정치철학의 긴밀한 연관을 고려한다. 저자는 “정치사상사에는 정치사상사의, 정치철학에는 정치철학의 고유한 사고법이 있기 마련”이라고 전제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정치사상사는 결코 마를 길 없는 앎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서양 정치사상사에 대한 좀더 심도 있는 이해를 도와줄 디딤돌이다.
이 책의 주요 대목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제국에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이해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유다. 따라서 한 사람의 황제가 휘두르는 공포의 힘에 이끌린 다수의 군사보다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조국을 지키려는 기개로 충만한 폴리스 쪽이 최종적으로는 우위에 선다고 말이다. 시민으로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곧 자유였다. (25쪽)
욕망만이 비대해진 인간, 혹은 용기는 있지만 이성이 부족한 인간이 있듯이, 부자와 가난한 자가 저마다의 욕망을 추구하는 폴리스(과두정, 민주정)나 가장 열악한 인간이 지배하는 폴리스(참주정)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군인이 지배하는 폴리스도 있을 수 있다. 플라톤이 이상으로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이성과 지성이 지배하는 폴리스(왕정, 귀족정)였다. (34쪽)
아리스토텔레스는 (…) 지배자의 수와 통치 내용의 적합성 여부를 조합해 6정체론을 제시한다. 한 사람이 지배하며 공공의 이익에 적합한 정체는 왕정, 그렇지 않은 정체는 참주정이고, 소수가 지배하며 공공의 이익에 적합한 정체는 귀족정, 그렇지 않은 정체는 과두정이며, 나아가 다수가 지배하며 공공의 이익에 적합한 정체는 ‘국제’(國制), 그렇지 않은 정체는 민주정이라 했다. (44쪽)
정치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론화 작업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졌고, 로마에서는 좀더 구체적이면서 실천적인 정치제도를 둘러싼 고찰이 진행되었다. 그리스의 폴리스가 줄곧 내부의 당파 대립에 의한 분열로 고심한 것과 달리, 로마는 오히려 여러 특수한 이해(利害)를 경합시키면서 하나의 제도로 통합하려 했다. 다원성과 보편성을 독특한 형태로 매개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51쪽)
마키아벨리는 단순한 군주정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공화정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여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다른 인문주의자들과는 관점이 달랐는데, 공화정에서의 자유보다는 오히려 공화정의 군사적 확대 능력에 무게를 두었다는 점에 마키아벨리의 특징이 있다. 그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든, 마키아벨리가 고전고대의 정치학을 후세의 서구사회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16∼117쪽)
홉스가 말한 주권은 결코 진리나 객관적 타당성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가 아닌 권위가 법을 만드는” 것이며, 자연법이 주권자를 구속하기는 해도 무엇이 자연법인지는 주권자가 판단한다. 그 결과 국가는 각 개인의 자기보존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주권자의 권력은 무한해진다. ‘올바른 통치’라는 것도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해서는 주권자가 판단하는 이상, 주권자를 제약할 원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홉스가 구상한 국가는 그야말로 ‘리바이어던’이었다. (148∼149쪽)
인간은 모두 홀로서기에 충분한 지성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현명하지’ 않다면 원인은 지성의 결여가 아닌 용기의 결여에 있다. 사람은 왜 타자의 지도에 따르는 것일까? 아마도 그쪽이 더 편하고 안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게으르고 겁부터 먹는 태도야말로 지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것이다. 계몽에 필요한 것은 지성의 후견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했다. (178∼179쪽)
칸트는 때때로 이념과 현실을 이항대립적으로 파악했다. 개인의 내면적인 도덕성이 어떻게 해서 객관적인 법과 결부되어 자유 이념을 구현해가는가? 칸트는 인류가 장기적으로는 이상적인 질서를 실현해나간다고 보았다. 반면에 헤겔은 이념과 현실을 이항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념이 현실에 구현되어가는 과정으로서 역사를 파악하려 했다. (…)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이다. (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