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다 놓치기도 하는 거요. 그게 무엇이든……
난 그게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바다 색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시간”이 아무리 소중해도 실제론, 적어도 혼자 아닌 여럿의 삶에서는 지키기 어렵다는 것. 그렇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통로란 이런 ‘시간’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지요. 그러나 이 시간이 지켜지지 않는다 해서 누구도 억울해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작가 함씨가 묻는 곳이지요. _김윤식(문학평론가)
소설가 함정임의 여덟번째 소설집 『저녁식사가 끝난 뒤』가 출간되었다. 기묘한 불협화음과도 같은 문체로 카니발적 꿈과 현실적 구속 사이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드러냈던 소설집들을 지나, 끊임없이 떠도는 인물들을 통해 이제는 희귀해진 비극적 낭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곡두』 이후 오 년여 만의 소설집이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발표된 작품들을 묶은 이 소설집에는 2012년, 201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림으로써 일찌감치 독자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저녁식사가 끝난 뒤」와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을 비롯하여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들이 실려 있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인 「저녁식사가 끝난 뒤」는 등단한 지 이십오 주년을 맞이한 소설가 함정임의 소설세계가 어떠한 풍경을 그려 보이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후, 바로 다음 달의 월평(『문학사상』 2011년 4월호)에서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어떤 지켜지지 않은 시간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설가 함정임의 마음이 가닿은 곳을 지적하고 있다. 바다 색이 아름다울 무렵으로 저녁 약속을 잡고, 그것이 어둠에 덮여 사라져버리기 전에 손님들이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누군가의 마음이란 얼마나 소중하고 또 고귀한 것인가.
하지만 그러한 순간은 홀로 상상하고 꿈꿨던 것 그대로 실현되기란 어려운 법이다. 만남이란 저멀리 떨어져 존재하던 각자의 시간과 바람이 힘겹게 다가와 얽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함정임이 이 삶의 풍경 중에서 유독 아름답다고 말하려는 것은 그러한 마음이 아니라 그것이 어긋난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떨어지면서도 제 빛을 잃지 않고 길게 꼬리를 뻗으며 빛나는 유성처럼, 마음은 결코 사라지는 법 없이 그 어긋나버린 시간 속까지 따라와 아름다움의 품을 넓히니 말이다. 그러니 이번 소설집은 바람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설렘보다는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여운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이미 그것이 져버린 날의 풍경을 떠올리는 독자들이라면, 이 여운의 풍부한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부재를 뚜렷한 현전으로 바꾸어버리는 마술 같은 이야기
길 위의 소설가 함정임이 보여주는 애도의 신비
분분히 흩뿌려진 아름다운 빛의 점들은 지나간 과거로 인해 상처입고 정해진 미래로 인해 낙담한 인간들에게 허락된 날카로운 감각이리라. 함정임의 소설은 부재에 기대어 오랜 시간을 견뎌온 이들의 몫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이유는 그들이 겪은 상실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상처가 그들의 것과 만날 때 느끼는 기쁨, 소설은 또한 그 찰나를 위해 마련된 사건이 아니겠는가. _이소연(문학평론가)
스스로 ‘노마드’임을 자처하는 소설가 함정임의 이번 소설집은 그러한 떠돎의 기질을 소설 속 인물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그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길 위를 떠돌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떠도는 자들은 머물러 있는 자들보다 좀더 부단하게 이 세계와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함정임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세계의 중심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상실’이 놓여 있다는 삶의 진실이 아닐까. 프랑스 여행중 접한 P선생의 부고 소식에 황망함을 느끼는 부부(「저녁식사가 끝난 뒤」), 그 의미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러웠던 죽음의 기억을 떠올리는 여자(「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 ), 길을 건너던 중 받아든 전화 속에서 느닷없이 옛 인연의 부고를 듣게 되는 남자(「오후의 기별」) 등 각 작품들 속에는 상실의 흔적이 뚜렷하게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집 『저녁식사가 끝난 뒤』가 마냥 우울하고 어두운 색채에 물들지 않는 까닭은 작가가 그 둘레에 이를 감싸안는 무언가를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에는 P선생을 떠올리며 각자 소중한 기억의 징표를 가지고 식탁에 둘러앉은 여덟 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마련해온 노래와 시와 음식이 빚어내는 따뜻하고 빛나는 삶의 풍경 속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살아남은 자의 비애 같은 것이 차마 끼어들지 못한다. 또한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소재는 삶을 향한 열정과 의지를 표현하듯 붉은색을 한 아코디언인데, 이 아코디언은 인간의 숨통처럼 주름을 폈다 접었다 함으로써 뜨거운 노래를 뿜어낸다. 그 소리는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서 엄마와 토끼, 노인의 죽음이 가져온 검은 그림자를 말끔히 걷어내고 삶의 따스함과 생동 속으로 소녀를 당겨온다. 그리고 「오후의 기별」에는 오로지 기억 속의 소녀를 제대로 보내주기 위해 한때 머물렀던 외국으로 날아가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가 간직해온 빛나는 순정은 한 하층민 소녀의 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남은 자의 삶까지 따스하게 덥힌다.
이번 소설집의 ‘작가의 말’에서 함정임은 “소설 쓰기란/추모의 형식 이외에/아무것도 아니라는/생각을 한다”면서 “미처 다가가지 못한/미처 풀지 못한/미처 주지 못한” 이들에게 소설을 바친다고 밝히고 있다. 세 차례나 반복되는 “미처”라는 부사 속에 앞서 지적했던 이번 소설집의 특징, ‘지켜지지 않은 시간’이 비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수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던 냉소적인 시선 사이의 동요를 소설의 자양분으로 삼았던 날들로부터 나아가 이제 함정임은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정조들이 일으키는 마찰을 특유의 관조로 아름답게 감싸안는 세계에 들어선 것 같다. “미처”라고 수차례 힘주어 말하는 마음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부재를 뚜렷한 현전으로 바꾸어버리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본문 중에서
쿵작쿵작. 공기주름통이 가슴에 닿자 마치 사람처럼 체온이 느껴졌다. 나비야, 나비야. 멕시코 삼촌이 무등을 태워주기 위해 나를 번쩍 들어올렸던 그날처럼, 춘아 고모가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아주던 그날들처럼, 나는 아코디언을 안은 채 전율을 느꼈다. _「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26쪽)
하얀 습자지에 싸인 그것을 처음 펼쳐보았을 때 우윳빛이 배어나오는 색감과 부드러운 기둥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물한테는 특별한 사람에게처럼 정이 가는 일이 있었는데, 순남씨에게 은촛대가 그랬다. _「저녁식사가 끝난 뒤」(33쪽)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서 글이라는 것을 써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지금의 이 생활이 어떻게 가능한지 신기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제는 하루라도 이 오래된 타자기를 두드리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공주님께서는 제게 아무 부담도 주고 싶지 않다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때 말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사실, 저는 공주님께서 하시려는 작업이 무엇인지 종종 궁금해집니다. _「그는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63~64쪽)
그는 나에 대해, 그러니까 나의 삶, 나의 과거, 심지어 이번 여행의 목적에 대해 묻지 않았고, 그런 그에게 자유로움과 호감을 느꼈다. 보이는 대로 그는 생각할 것이고, 나 또한 그에 대해 그러할 것이었다. _「어떤 여름」(92쪽)
하늘로 올랐으려나. 이제 자네 차례네. 순정?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네. 없으면, 사내도 아니지만. 박이 사공의 노를 저지했다. 안나가 흘러간 그 물길을 따라 조금 더 흘러가보고 싶었다. 박은 눈을 감았다.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사공이 노 젓는 소리, 흐르는 물소리였다. _「오후의 기별」(121쪽)
그것이 정말 구두였는지, 그렇다면 누구의 것이었는지, 또한 그것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 너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물감의 흔적을 또렷이 새겨놓았고, 이물감이란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생명력이었다. _「구두의 기원」(139쪽)
나는 그 우물, 천 년 동안 아이를 고이 품어온 그 우물이 보고 싶었다. 그 시커먼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우물이라 했다. 어린아이를 집어삼킨 무시무시한 우물로 알려지기도 했다. 우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인골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_「밤의 관조」(165쪽)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햇빛 쏟아지는 난간에 세워놓고 소리쳤다. 웃어요, 언니, 웃어! 웃는다고 웃었는데 결과는 찡그린 미소였다. 햇빛 때문이었다. 나는 그늘에서 카메라에 찍힌 상태를 확인하며 다시 한번 찍으려다 그만두었다. U는 마치 너무 웃지 않아서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웃어! 라는 내 외침에 당혹스럽게 웃음을 지었던 것이었다. _「꽃 핀 언덕」(202쪽)
차례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 _007
저녁식사가 끝난 뒤 _029
그는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_055
어떤 여름 _079
오후의 기별 _101
구두의 기원 _123
밤의 관조 _147
꽃 핀 언덕 _171
해설 | 이소연(문학평론가)
그대 상심이 내 상처와 만날 때 _203
작가의 말 _220
함정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장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밤은 말한다』 『동행』 『당신의 물고기』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 『곡두』, 중편소설 『아주 사소한 중독』, 장편소설 『행복』 『춘하추동』 『내 남자의 책』, 문학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 『소설가의 여행법』, 번역서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행복을 주는 그림』 등 다수를 출간했다.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과에 재직하면서 소설창작과 소설연구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