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한 고압(高壓)의 문장으로 그려낸,
삶의 전면적 속화(俗化)를 향한 애가
2006년 『내 머릿속의 개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지성적인 문체와 개성적인 소설세계를 선보인 작가 이상운의 신작 장편소설 『신촌의 개들』이 출간되었다. 수상 당시, “작지만 단단한 보석을 쓰레기 갈피에 숨겨놓고 독자를 끌고 가는 솜씨”(박완서)라는 평가를 받으며 읽는 이에게 낯선 놀라움을, “서사적 박력”(서영채)으로 소설 읽기의 쾌감을 선사했던 그가 이번엔 소설가 ‘나’를 화자로 내세워 신촌에 위치한 한 카페의 점진적 몰락을 통해 한 시대의 쓸쓸한 풍속화를 그려냈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은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동안 구상하며 쓰인 소설이다(이날들은 2014년에 출간된 다큐 에세이『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에 기록돼 있다).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무대 위에서 인간은 결국 소멸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바, 그는 이미 그렇게 사라져버린 삶의 한 순간, ‘청춘’을 떠올리며 뒤늦은, 그러나 그만큼 치열한 애도 작업을 수행한다.
“세월은 흐르고, 모였던 것들은 흩어지며, 세워진 것들은 무너지고,
아름답게 담아낸 모든 음식들의 마지막 흔적은 똥이다.”
봄날의 일요일, 막 출간된 ‘나’의 신간 『신촌의 개들』이 집에 배달된 다음날, ‘나’는 신촌에 있는 카페 ‘개들’을 찾아간다. 카페 ‘개들’은, 청춘의 개성을 말살하고 평균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해 체계화된 대학이라는 공장, 그 컨베이어벨트 위를 통과해가던 시절의 밤마다 찾았던 곳이다. 그 무대 위에서 ‘나’를 비롯한 청춘들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자기과시, 헛된 다짐과 허영을 분출하며 카페 밖의 개들을 욕했었다. 그때 남들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오로지 인간을 이해하고 싶은 바람 하나로 기행을 일삼던, 그러나 이제는 그저 속물 은둔 작가가 되어버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병들어 누워 있는 카페 주인뿐. ‘나’는 책을 펼쳐 한 구절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세월은 흐르고, 모였던 것들은 흩어지며, 세워진 것들은 무너지고, 아름답게 담아낸 모든 음식들의 마지막 흔적은 똥이다.”(38쪽)
소멸해가는 추억의 공간에서 ‘나’가 할 수 있는 일,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일은 그 청춘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그때 함께 분노하고 조롱했던 개들, 학문과 삶을 철저하게 또 전문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최고의 분열적 기만을 보여주었던 우수한 배우들…… 그리고 회상의 끝엔 생각만으로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존재 다해씨가 있다.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함은 물론, 학자의 길을 걸으려는 의지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의 가족도 없었던 외로운 영혼. 그녀의 반짝임은 다음의 에피소드에서 단연 빛을 발한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갈등이 사실은 학문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철저한 이해관계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두 그룹 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선다. 안에 남을 것인가, 복도 밖으로 나갈 것인가. 그녀는 그들을 혐오하며, 그들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 또한 혐오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층 높이의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내가 나 자신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어요!”(72쪽)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제아무리 빛나고 아름다운 존재라 할지라도 육체의 노쇠와 영혼의 쇠락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어떤 강렬하고 치열한 저항의 몸짓으로도. 바로 시간이라는 무자비하고 절대적인 조건 때문에 말이다. 그리하여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나’와 설치미술가, 전위시인은 물론 그 빛나던 다해씨, 그리고 이들에게 귀를 내어주고, 자유의 무대를 마련해주었던 개들의 주인은 모두 저마다 ‘죽는다’. 각각 속물 은둔 작가, 베스트셀러 동화작가, 공무원이 됨으로써.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긴 병마와의 싸움에 예정대로 패배함으로써.
이 모든 이야기가 오로지 단 한 단락으로 쓰였다. 숨가쁘게 청춘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소설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두번째 단락을 통해 이야기의 마지막을 고한다. “우리가 청춘을 죽였다.”(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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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죽음의 여정에 든 고령의 아버지와 동행하던 시절에 쓴 것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시간의 열매인 성장, 즉 몰락과 죽음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강한 연대가 있다. 더불어, 자기 몫의 삶을 마감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나의 무의식이, 내 청춘(들)의 죽음을 뒤늦게 애도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웃기고 울적하고 신랄하게 연출한 심야 모노드라마를, 독자들은 각자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서 희극적으로도, 우울하게도, 힘겹게도, 통쾌하게도 읽게 될 텐데,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희극적으로, 우울하게, 힘겨워하면서, 통쾌하게 썼다. 지금 청춘인 모든 청춘들에게, 그리고 한때 청춘이었던 모든 청춘들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 _‘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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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친구들은 옛날 그 자리에서 조금도 변함없이 문을 열고 있는 나를 찾지 않는 거지?” 나는 대답이 마련되어 있었다. “청춘이 중년을 생각하지 않듯이 중년은 결국 청춘을 버리게 되어 있어.”(14쪽)
카페 개들은 하나둘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는 매일 밤이면 술과 음악과 다양한 대화로 구성된 전무후무한 가설무대가 되었으며, 그 무대의 배우들로서 우리는 저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자기과시와 엉뚱한 다짐과 허영을 내뿜으면서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듯이 보이는 각자의 터널을 통과해갔다.(32~33쪽)
“이 세상을 만든 신이라는 존재가 있고 네가 그 신이라면 어떨 것 같아?” (……) “그런 존재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있다고 해도 그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뭔가를 했다고 생각되지 않으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아마.”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내 말에는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자신은 결코 신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 세상의 끊이지 않는 비탄이 내 가슴을 찢어놓을 테니까! 멍멍!”(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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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을 싫어할 분들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할 분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 이 글을 쓴다. 한국소설의 특징이 ‘서사 결핍’이나 ‘내면 과잉’이라는 빈곤한 말로 다 요약된다고 믿는 분들에게 이 소설은, 때아닌 80년대 회고담의 형태를 띤, 바로 그런 소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란 삶의 덧없음 앞에 최대한 정직해지기 위해 벌이는 정신적 투쟁의 결과라고 믿는 나 같은 이에게 이 소설은, 정교한 고압(高壓)의 문장으로 그 투쟁을 기록한, 지독한 선물이다. “세월은 흐르고, 모였던 것들은 흩어지며, 세워진 것들은 무너지고, 아름답게 담아낸 모든 음식들의 마지막 흔적은 똥이다.” 지난 이삼십 년 동안 우리의 고귀한 영역들은 곳곳에서 무너졌다. 이 소설에서 카페 ‘신촌의 개들’의 점진적 몰락은 저 전면적 속화(俗化)과정의 쓸쓸한 풍속화이자 히스테리컬한 애가(哀歌)다. 그래서 작가는 ‘뒤늦은 애도’라 했겠지만 나는 ‘치열한 환멸’이라 말하고도 싶다. 애도는 조만간 잊는다는 것이고 환멸은 계속 싸운다는 것이다. 순수한 이의 최선을 다한 환멸이 속화된 독자에게 가하는 예리한 고통의 효용을 이 소설을 읽으며 실감했다. 이런 환멸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반가움, 이 환멸마저 잃으면 우리는 끝이라는 두려움. 이를테면 오십 년 만에 다시 쓰인 「환상수첩」(김승옥)을 읽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상운의 다음 소설을 간과하지 않으려고 한다. _신형철 (문학평론가,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