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서부터 문학의 먼길을 걸어나왔다”
문학의 은유와 비루한 현실을 넘나들며 살아온 작가 인생 42년
세월이 흘러도 낡지 않는 작가, 박범신 중단편전집 출간!
소설가 박범신의 중단편소설을 총망라한 전집.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데뷔작 「여름의 잔해」부터 2006년 발표한 단편 「아버지 골룸」까지 묶었다. 1978년 초간되었던 첫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과 연작소설집 『흰 소가 끄는 수레』 『빈방』을 제외한 네 권은 작가가 직접 목차를 정리했다. 『흉기』는 1970, 8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을,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묶었다.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은 자본주의 시대의 다양한 폭력의 얼굴과, 그 험난한 시대 속에서 육체와 정신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윤리, 정직성을 엿볼 수 있다. 『엔도르핀 프로젝트』의 경우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발표한 작품과 2000년대에 발표한 작품을 한데 엮어, 한 작가를 두고 이십 여 년의 시간의 단층을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쪼다 파티』는 몇 권의 콩트집에서 작가가 직접 추려낸 작품을 묶은 콩트집이다. 작가는 “인생의 단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콩트는 버릴 수 없는 경제적 소설양식”이라 말하며, 콩트집을 중단편전집 마지막 권으로 더했다.
문학이란 “목매달고 죽어도 좋은 나무”라 말하는 그, 항상 위태롭게 보고 가파르게 부딪치며 사는 작가 박범신. 채우려 하면 할수록 비어가는 현대인의 쓸쓸한 내면, 부조리한 현실과 그 현실을 뒤덮은 욕망, 그에 맞선 순수에의 갈망을 그려온 그의 중단편 작품세계. 화려한 문체와 단단한 서사로 무장한 그 진면목을 이번 전집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박범신 중단편전집 3 엔도르핀 프로젝트
“욕망의 난폭한 폭발을 유도하는 저 바깥세상의 포식자들에게”
비루한 현실을 뒤덮은 욕망과 그에 맞선 순수에의 갈망
죽음, 혹은 세상의 끝을 대면하고서 얻은 구원과 자유!
1970, 80년대에 쓴 작품(「겨울 사냥」 「내 귀는 낙타 등허리」 「취중 경기」 「염소 목도리」 「열아홉 살의 겨울」 「아침에 날린 풍선」)과 2000년대에 쓴 작품(「엔도르핀 프로젝트」 「아버지 골룸」)이 한 권에 묶여 있다. 한 작가를 두고, 이십여 년 이상 되는 시간의 단층을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집. 동시에 이 작품집은 학생·여성잡지에 실은 작품과 문예지에 실은 작품을 함께 묶은 것이기도 한데, 작가는 이런 구성에 대해 “이른바 본격문학적, 대중문학적 어필의 차이도 느껴볼 수 있는 작품집이 된 셈이다. 내가 구태여 ‘본격문학’이라 하지 않고 ‘본격문학적’이라는 어정쩡한 말을 사용하는 것은 본격문학, 대중문학 따위의 말로 문학을 편 갈라 층위를 두려는 협소한 태도를 평생 거부해왔기 때문이다”(「작가의 말」에서)라고 덧붙였다.
‘바깥세상의 포식자들’을 향한 저항의식과, 비루한 현실 저 극단에 놓인 죽음과 대면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고 구원을 얻는 모습까지,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아우르며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다각도로 모색한 작품 여덟 편이 실려 있다.
나를 분노하게 했던 시대는, 내가 고통처럼 껴안고자 했던 시대는 내 가슴에 있었다. 나는 귀를 후볐다. 후비고 후비고 또 후볐다. 딱지가 떨어지고, 떨어진 딱지들을 손바닥에 올려놓자 찌걱찌걱 진물이 나왔다. 귀는 무죄예요. 아내가 애원하듯 말했다. 아냐! 나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귀는 내 신체의 일부였고, 나는 세상에 대해 침묵하거나 우회하고 있으므로 여전히 죄인이었다.
내 귀는 낙타 등허리.
언제, 내 양손에서 내가 사랑하는 귀는 자유롭게 풀어놓아질 것인가. 단지 그것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귀를 내가 용서하는 일이었다.
—「내 귀는 낙타 등허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