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소감에 나는 기중기와 칠레산 홍어와 사라지는 꼬리, 커다란 입 같은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적었다. 그동안에 기중기에 관한 시를 한 편 썼는데 너무 시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칠레산 홍어에 관한 시는 아직 쓰지 못했고 경동시장에서 홍어를 한 마리 사다가 된장을 풀어 끓여 먹었다. 칠레라는 이름의 긴 나라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이다. 뒤돌아보면 꼬리뿐인 고양이들과 자주 마주치고, 나는 새로운 것들을 해야 할 때마다(요즘에는 운전이 그러한데) 커다란 입속으로 들어가는 공포감을 맛본다. 도로를 긴 혀로 생각하니 또 시적인 것 같다.
그러나 시적인 것에 대해 의식하거나 몰두하지 않으려는 힘이 나에게 시를 쓰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못된 아이처럼. 그러나 또 지금 착한 아이를 꿈꾸며 나는 참 고분고분해져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사람들은 조금 다르거나 이상하면 금방 주목한다. 그러한 주목과 관심은 참 여러 방향으로 힘을 갖는다. 살면서 사랑하면서 나는, ‘감정선이 붕괴되었다’고 며칠 전 생각했었지만 오늘은 산고개를 넘으며 단풍이 참 곱다고 ‘가을이 깊었다’고 생각했다.
- -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중에서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면 좋겠다. 날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계절마다 이름을 바꾼다면 이 어수선한 봄날, 내게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이름이 두 글자가 아니라면 또 어떨까. 오늘 나는 ‘고양이 목걸이를 하고 걸어가는 목 쉰 사람’. 내일은 ‘꿈속의 물컹한 손가락’. 이름이 없으면 좋을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냥 나를 ‘빵’이라 불러줬으면 좋을 것 같은 날도 있다. 내가 쓴 작품들을 나의 긴 이름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내가 길어지거나 뚱뚱해지거나 재밌거나 지루하거나. 그런데 오늘도 내 이름은 가지런하고 딱딱하다. 내 앞으로 우편물이 세 개 도착했다. 우리집 꼬마는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다 ‘까까 꼬꼬’라 부른다. 밥도 과일도 책도 텔레비전도 까까 꼬꼬가 되고, 지나가는 사람도 나무도 돌멩이도 까까 꼬꼬라 한다. 하루이틀 사이 정교해져서 ‘깜깜 꼭꼭’이 되기도 한다. 나도 그런 ‘무서운’ 까까 꼬꼬가 있으면 좋겠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아무나에게 손을 흔들고 무엇에게도 다 인사를 한다. 다 사랑할 수 없어서 나는 날마다 다른 이름을 꿈꾸고 헤매고 멈추고 넘어지는 것 같다. 앞으로는 좀더 창조적으로 살아보겠다.
- - -「가지런하고 딱딱한 이름」중에서
작가의 말
십여 년 전부터 썼던 산문들을 엮어 낸다. 들쭉날쭉 보기 싫다. 무용한 짓인 것도 같다. 나중에라도 혹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산문집이 날 보며 씩 웃어줄 것이다. 헛짓이라도 하긴 했어. 못났지만 애썼어. 위로를 건네주면 좋겠다. 변두리 골목길의 소녀, 부모님 애먹이는 고집불통의 딸,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 길을 잃었던 여자, 말없고 질긴 아내, 신경질적인 엄마가 부분적으로 녹아 있으니 부끄럽고도 다행스럽다. 지금도 계속 산문을 쓰고 있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글을 잘 쓰는 법이 아니라 침묵하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적은 수다를 응원해준 가족들, 동료들, 선생님들,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5년 늦가을.
이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