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시인선 103 홍일표 시집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가 출간되었다. 1998년 『심상』 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의 네번째 시집이다. 시인으로서의 생 전반을 비유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뭐랄까, 폭발적인 스타트보다는 점점점 가속이 붙어 피니시 라인에 한층 여유로 몸을 갖다댈 줄 아는 관록 있는 근육의 내공자 같달까.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를 읽어나가면 알겠지만 크게 두 스타일의 소회로 나뉠 것임을 미리 짐작하는 바이다. 익히 홍일표 시인의 시를 알던 이들은 역시나 이 리듬, 하며 무릎을 칠 것이고, 미처 홍일표 시인의 시를 몰랐던 이들은 어머나 이 한 줄, 하며 시집을 제 손으로 감쌀 것이다. 왜? 절로 좋아서!
앞서 밝히자면 홍일표라는 시인이 그 스스로 온전한 ´악기´라는 사실이다. 그 울림통이 꽤나 크고 넓고 깊은데, 기교로 승부하려는 잔꾀 없이 시라는 제 소리를 피리소리처럼 불어 흘리는 예인이자 진정한 ´꾼´이라는 사실이다. 제 ´잘함´과 제 ´좋음´에 도통 호들갑이 없고 한발 앞서 저 홀로 목청을 뽐내기보다 한발 뒤에서 모두와 섞일 가락으로 더 낮게 더 잦게 허밍을 연습하는 합창단원들 ´여럿´의 목소리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혼자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되는 시. 총 4부로 나뉘어 담긴 61편의 시를 아주 맛있게 읽는 방법을 일단 일러드리자면, 시의 제목과 그 시가 시작되는 도입 첫 문장에 밑줄을 그어 나란히 보십사 하는 거다. 예컨대 이렇게다. 「빵」=나는 부풀어 무명의 신에게 닿는다, 「귀로」=9층이 9층 밖으로 범람한다, 「원반던지기 선수의 고독」=나는 하나 남은 태양을 쥐고 있다, 「쥐」=빛의 손가락이 닿지 않는 구멍에서 혼자 눈뜨는 검은 별을 본 적이 있다, 「감자가 있어요」=사슴뿔 같은 푸른 왕관을 쓰고 있던 이의 마음이었나요, 등등 재미를 붙여가면서 말이다.
비단 첫 문장뿐만이 아니라 이 시집은 한 편의 시 안에서 시 제목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는 문장과 문장이 고도의 집중력을 자랑한다. 쓰고자 하고 완성하고자 하는 시를 염두한 뒤로는 오로지 그 방향으로만 집중할 뿐, 좀처럼 시선을 딴 데로 돌리거나 체머리 흔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전속력의 질주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아마도 시 특유의 직관일 것이다.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보는 즉시 파악해버는 능력, 그 직관. 무수히 널려 있는 직관의 무덤 가운데 “가끔 공룡알을 줍는다/ 부화하지 않은/ 바삭 깨어지면서 태어나는 허공”(「공갈빵」)과 같은 귀여움은 또한 덤이고 말이다.
홍일표 시인의 뛰어난 직관은 섬세한 감수성을 그 기본 베이스로 하는데 이때에도 시인만의 어떤 착함, 어떤 차분함, 어떤 품격이 그 시라는 농토를 기름지게 한다. 시인은 시가 그리 대단한 것도 그리 고결한 것도 그리 신적인 것도 아닌, 그저 ´노래´임을 타고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같다. 시를 강요나 강조의 목적으로도, 시를 장식과 폼의 목적으로도, 시를 말씀과 전례로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리듬감 있는 노래로 우리 뼈마디에 가락을 새기려는 사람 같다.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왜 줄기차게 그의 문장들에 밑줄을 긋는가 하면 내 마음을 둥둥 치는 북채를 만난 듯해서일 거다. “인간은 인간을 넘어서지 않는다고 시간은 사기라고 혁명은 한 번도 없었다고 잠시 눈감고 지나간 불우한 연애였다고 왜 밤은 아직도 자살하지 않느냐고 죽은 이가 부르다 만 노래는 바위 속에서 깜박이는 촛불이라고 몇 번을 더 죽어야 죽지 않겠느냐고 몇 번을 더 살아야 눈보라 밖에 서 있는 당신의 아침을 아침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고리」) 하지 않는가.
시인은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
”(「악기
」)라고 말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노래를 주러 온 사람 같다
. “온몸을 검게 칠하고 흐느끼는 밤비처럼
”(「쥐
」), “입도 입술도 없이 남몰래 흐느끼
”(「알코올
」)는 너처럼
.
● 시인의 말
남은 빛을 끌어모아 뼛속에 철심으로 세울 때까지
펜 끝에서 흘러나오는 밤을 따라가면 조금씩 피가 붉어지는 동쪽이다.
언어가 닿지 못하는 그곳이 멀지 않아
다시 이곳에 없는 시(詩)로 걷는다.
2018년 3월
홍일표
● 책 속에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빈 그릇에 담긴 것은 다 식은 아침이거나 곰팡이 핀 제삿밥이었다 콜로세움의 노인도 피렌체의 돌계단 아래 핀 히아신스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유적의 차가운 발등에 남은 손자국만큼 허허로운 일이나 한 번의 키스는 신화로 남아 몇 개의 문장으로 태어났다 불꽃의 서사는 오래가지 않아서 가파른 언덕을 삼킨 저녁의 등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지상의 꽃들은 숨쉬지 않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골목은 저물고 나는 입 밖의 모든 입을 봉인하였다 여섯시는 자라지 않고 서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삽 끝에 부딪는 햇살들이 비명처럼 날카로워졌다 흙과 돌 틈에서 뼈 같은 울음이 비어져나왔다 오래전 죽은 악기였다 음악을 놓친 울림통 안에서 검은 밤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
— 「악기」 전문
히아신스를 번역하는 일로 일생을 보낸 늙은 학자의 머리칼을 누가 번역하나 몸을 번역하여 끄집어내는 머리올은 가늘고 긴 백색의 문장, 아무리 살펴봐도 글자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구름에 복무한 몸은 지워지고, 천둥 번개를 삼킨 공중과 히아신스를 잡고 있던 손가락은 어디 있나
히아신스가 있긴 있었나 상가를 다녀온 날 검은 머리카락이 평생 중얼거린 말을 한 줄로 요약하는 거미를 본다 흰 거미줄에 이슬방울 하나 걸어놓고 어딘가에 크고 둥근 세계가 있다고 몸을 흔들면서
얼음을 따라가다 종점 근처에 빈 막대기로 서 있는 아이처럼 얼음은 어디에도 없고, 매미 우는 소리에 뜨겁게 달구어지는 햇살은 또다른 오역, 오역의 눈부신 한때였나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를 떠나고, 늙은 학자의 몸을 번역한 최종본은 소나무숲을 덮은 적설, 솔잎에 얹힌 눈의 무게만큼 밤은 왜 무거워지나 한쪽 눈을 찡그리고 봐도 토씨 하나 보이지 않는
— 「오역」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