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환함. 밝음. 더 나은 것. 미래. 절정. 변화. 이런 단어들을 부정하고 혐오하는 힘으로 써내려간 낙서가 희미한 믿음과 작은 소망으로 바뀌는 낯선 기분이 들 땐 간밤의 꿈조차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확한 문장처럼. 선명한 색채처럼. 깨끗하게 써내려간 뒤 찍는 마침표처럼. ―‘작가의 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엄연한 있음을 사유하게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이다
―황순원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 정용준 신작 장편소설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소설집 『가나』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을 펴내며 ‘우리 문단의 새롭고도 뜨거운 피’로 자리매김한 작가 정용준. 두 권의 소설집에서 섬뜩한 이미지와 탄탄하고 현실적인 서사로 삶의 폭력성에 노출된 인물들을 가감 없이 그려낸 한편, 장편 『바벨』은 말의 무게를 재는 한 편의 실험극과 같은 작품으로, 단편과는 또다른 세계를 담고 있었다.
두 번째 장편 『프롬 토니오』에서 작가는 시공간을 초월해, 삶과 죽음까지도 넘어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바닷속의 바다, 우리가 아직 아는 바 없고 경험한 적 없으나 그렇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오십 년의 시차를 온몸으로 견뎌내 삶의 세계로 돌아온 인물 토니오와, 그런 토니오를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미국인 화산학자 시몬, 일본인 지진학자 데쓰로를 통해 소중한 사람을 잃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인물들이 죽음보다는 삶의 손을, 고통보다는 함께했던 기억의 손을, 절망보다는 숭고함의 손을 드는 과정을 담아낸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연재를 시작하며, “숨겨진 풍경들, 눈과 귀로 느낄 수 없는 감각들을 문장으로 써보고 싶었”다고 밝힌 정용준 작가. 작가가 마련한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마침내 “눈에 보이도록 잘 그려냄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엄연한 있음을 사유하게 하는 것임을, 그것이 소설임을 알게 된다.”(소설가 이승우, 추천사에서)
두고 온 것들. 지나온 것들. 되돌릴 수 없는 모든 것. 나의 사랑…
―이곳에 있으면 삶이지만, 그곳을 향해 가면 이야기가 된다
포르투갈의 화산섬 마데이라 해변에 오 미터 크기의 파일럿고래 스물여섯 마리가 몸을 뉘인 채 죽어간다. 그 가운데 수치화할 수 없는 거대한 흰수염고래도 한 마리 있다. 해양 동물의 갑작스러운 집단자살 현상인 ‘스트랜딩’으로 보이는 현장에서, 미국인 화산학자 시몬은 기이한 생명체와 조우한다. 동물도 인간도 아닌 무엇, 흰수염고래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것’ 앞에서 시몬은 설명할 수 없는 연민과 호감을 느껴 자신의 거처로 ‘그것’을 옮겨온다. 하우스메이트이자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일본인 지진학자 데쓰로는 ‘그것’이 점점 사람의 형상이 되어가고 말까지 하는 기현상을 지켜보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시몬에게 이 사태에 대해 조언하지만, 시몬은 데쓰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것’에서 ‘토니오’로, ‘괴생물체’에서 ‘사람’으로 점점 변해가는 과정 가운데, 토니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 시몬의 실종된 연인인 앨런을 만나고 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니오가 전해준 앨런의 말은 과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설득되지 않지만, 이성의 영역 바깥에서 시몬을 강하게 이끄는 ‘진실’이 토니오의 손에 분명히 쥐여 있었고, 시몬은 이제 토니오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편 데쓰로에게도 상실의 경험이 있으니, 1995년 고베 대지진으로 아버지와 여동생, 조카를 잃은 것이다. 남은 가족은 어머니와 일본어로 ‘바다’를 뜻하는 ‘우미’라는 이름의 고양이뿐. 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지진학자, 데쓰로는 그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인물이다. 불분명한 신원, 환상적인 이야기로 상심한 이를 현혹하는 사이비 교주를 고베에서 마주한 적 있는 데쓰로에게 토니오 역시 그 교주와 다를 바 없다.
그런 토니오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러 프랑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오십 년 전 우편 비행사였으며 하늘을 날다가 적기에 격추되어 바다로 추락했고 그뒤로 실종 처리되었다는 토니오의 이력이 어딘가 낯익은 것은 우연일까. 시몬과 데쓰로는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토니오를 무사히 프랑스로 데려갈 수 있을까. 그곳에서 토니오는, 죽음을 뛰어넘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며 그리워한 연인을 만날 수 있을까…
“영혼은 바로 그곳에 머문다네. 그리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정용준이 만들어낸 세계, 유토와 우토
“내가 누군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할 수 있네. 유토피아는 두 가지의 어원을 갖고 있어. 유토포스(eu-topos), 말 그대로 ‘좋은 곳’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우토포스(ou-topos),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네. 이 세계엔 유토피아가 없지만 내가 있었던 세계엔 있지. 바다 깊은 곳에 또다른 바다가 있네. 바다의 바다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유토(euto)가 있네. 그곳의 대기가 이렇게 황금빛이었네. 머리 위의 하늘과 흐르는 물결 속에 금이 녹아 있었지. 녹은 철과 금으로 이루어진 바다, 유토. 나는 그곳에서 건너왔네.”(96쪽)
작가는 중력이 없는 지구의 중심이자 바다 밑의 바다, 세계의 안쪽을 뜻하는 ‘유토’와 더는 존재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모여 있는 무덤 같은 세계를 뜻하는 ‘우토’를 쌍생처럼 만들어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다른 생에 대한 호기심에 작가의 우주적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다. 낮과 밤이 없고 안과 밖의 개념도 없으며, 삶과 죽음도 현실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곳. 토니오로 하여금 안락한 ‘유토’에서 쓸쓸한 ‘우토’를 거쳐 다시 현실세계로 되돌아오게 만든 이유와 더불어, 현실세계에서의 관조적인 토니오의 목소리와, ‘유토’와 ‘우토’에서의 시적인 표현들이 묘한 울림이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우리가 ‘끝’이라 생각하는 하늘과 땅과 바다, 죽음과 사랑과 기억의 ‘그다음 있다면’ 하고 가만히 그려보게 한다. 그것이 독자가 토니오로부터(from Tonnio) 얻는,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가만히 손바닥을 덥히는 한줄기 햇살 같은 따스함이리라.
*추천사*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한다는 표현은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이다. 보는 역할을 담당하는 눈의 기능을 감안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한 것을 향한 욕망은 대부분의 진지한 작가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만이 그들이 참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소설 『프롬 토니오』에서 우리는 그 불가시의 세계를 주목하는 정용준의 집중력을 본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재료를 동원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다른 생에 대한 우리의 무딘 감각을 필사적으로 일깨우려 한다.
정용준은 기존의 신화를 해석해 새로운 신화를 쓰고, 그 신화가 공허해지지 않도록 이야기에 중력을 부여했다. 성실한 취재와 자료 수집, 플롯과 개연성 등 소설공학적 장치들이 그가 자기 이야기에 중력을 부여하는 방법이다. 소설쓰기에 바친 작가의 수고를 생각하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주목(하게) 하는 방법이 눈에 보이게 그리는, 그려서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눈에 보이도록 잘 그려냄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엄연한 있음을 사유하게 하는 것임을, 그것이 소설임을 알게 된다. _이승우(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