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배수아의 결정적 순간들을 다시 만난다
작가 배수아는 1993년 등단하여 30년 가까이 ‘한국문학의 가장 낯선 존재’로,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장르로 만들어왔다. 그의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허기진 줄 모른 채 허기져왔던 새로운 감각에 눈뜨게 했다. 시공간의 원근을 비틀어 비일상적인 것,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운 것으로 가득한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소설을 읽는 일이 주는 감상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켰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배수아라는 이름의 그 세계에 결정적 장면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네 작품을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만난다. 삼십대에 막 접어들어 펴낸 첫 번째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이듬해 펴낸 두번째 장편소설 『부주의한 사랑』, 마니아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품이자 ‘에세이즘적 글쓰기’의 대표격으로 일컬어지는 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 여행가의 세계와 에세이스트의 세계 사이에 놓일 독특한 소설집 『훌』이 그것이다. 늙거나 낡지 않은 작품들. 환상적인 불협화음, 독창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 작품들은 배수아의 새로운 독자는 물론, 오랜 독자에게도 반가운 선물이 될 것이다.
나는 소설이란 독자의 감수성과 감수능력과 독서력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는 편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독자의 상상력이 함께 요구된다고.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마침내 살게 되는 거라고. 나는 내 소설이 상상력이 있는 독자를 스스로 찾아가기를,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_배수아, 『악스트』 no.17 송종원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배수아의 소설은 익숙한 정체성의 징표들을 버리고 ‘구별된 나’를 선언했다. 부당한 보편성이나 미리 놓여 있는 공통감각으로 환원되지 않는 단독적인 ‘나’를 재발견하기 위해 배수아의 소설은 여행을 계속해온 셈이다.”(문학평론가 김미정) “암시와 회상, 망각과 착각 사이를 오가는 현기증. 그 현기증 사이로 모든 확실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미끌거리는 느낌. 이것이 배수아의 소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사물들의 세계가 녹아 없어지기 직전에 이르는 재난의 체험이다. 이 재난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체험의 입구로 데려다준다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문학평론가 권희철) 읽는 이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고 깨어나게 하는 소설, 국적과 성별과 모국어와 그에 따라 부여되고 당연시되는 역할과 운명들에서 탈피한 소설, 설명되기보다는 체험되는 소설, 그 신비로운 세계로의 입장을 적극 권한다.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생의 아주 짧은 한순간이 있고
그것은 정말로 불현듯 찾아온다.”
아름다운 소설만이 위험할 수 있다, 배수아 초기 실험작
1996년 발표한 배수아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 ‘미령’과 ‘모령’ 자매, 그들이 낳거나 기른 아이 ‘나’와 ‘연연(蓮蓮)’, 네 여성의 삶과 그들 각자의 ‘부주의한 사랑’이 불러일으킨 파국이 선명한 이미지들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이모이면서 어머니인 존재, 친언니이지만 사촌이 되는 존재, 이모부이자 아버지인 존재 등의 혼란스러운 설정이 논리적인 서사성이나 연대기적 질서 없이 흐르며 ‘읽기’보다는 ‘보기’에 가까운 독서 경험을 가능케 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흰색과 녹색, 핑크로 채색해 보여주는 방식. 작가는 어쩌면 삶을 이미지로 겪는지 모른다.
배수아가 그린 부주의한 사랑은 ‘부주의했던 사랑’으로 끝나지 않는다. 과거의 부주의한 사랑들이 응고되지 않은 채 현재로 흘러들어와 ‘나’의 빈틈을 메우려 한다. 위악적이기를 선택한 부주의한 사랑은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기 때문에 기억된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나는 밤에 문득 잠을 깬다. 가을바람이 창문을 사정없이 흔들고 지나가고 먼 강에서 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비바람은 슬픔에 싸인 여자처럼 울고 있었다. 나는 나이들고 지쳤다. 바람이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기를 바라며 이제는 꿈속에서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고 이제 조용히, 조용히 죽어가기만을 바란다고 생각한다. 더이상의 일은 생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반드시 그러리라.
_185~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