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김무명들이 남긴 생의 흔적
- 저자
- 이정식
- 출판사
- 글항아리
- 발행일
- 2021-07-09
- 사양
- 176쪽 | 130*200 | 각양장
- ISBN
- 978-89-6735-919-5 03810
- 분야
- 산문집/비소설
- 정가
- 15,000원
-
도서소개
가출 청소년, 빈곤, 동성애 혐오, 교도소, HIV 낙인……
사회에서 호명되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
그들을 불러내 빛을 비추는 삶에 관한 이야기
감염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HIV 감염인들의 삶을 작품으로 만들다
그간 많은 매체에서 이정식 작가를 인터뷰하며 그의 생각과 작품 활동이 드러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무언가 입 밖으로 말하는 순간, 그의 이미지를 소비하거나 그에게 덧씌워진 낙인을 더 강화하는 일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설명하자면, 이정식은 10대 시절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 집을 나와 시설에서 지냈던 가출 청소년이고, 빈곤한 삶을 살면서 장애인 활동보조를 했으며, 동성애 혐오의 시선과 언어들을 감내하면서 이를 시각언어 작품으로 승화시켜왔고, 병역거부로 교도소 생활을 했다. 2013년에는 HIV/AIDS 양성 판정을 받은 뒤 이를 감추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바로 이 책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을 통해서다. 미술 작가에게 1인칭 에세이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 수 있다. 자기주장보다 예술을 통해 관객이 경험하고 판단력을 얻도록 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의 욕망은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강력한 힘이 있다. 새로운 관계를 맺길 바라고, 이야기를 하는 데 능한 작가는 자기 어머니(이은주)를 인터뷰이로 내세워 자신을 인터뷰하게 만들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엄마가 되고 엄마가 자신이 되어 독자들에게 상상해보지 못한 삶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든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한 번도 내 삶이 아니었던 것을 경험하거나, 혹은 당사자로서 사회 밖으로 밀려나 체계 안으로 편입되지 못했던 자신을 안으로 끌어당겨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살면서 사회로부터 원천적으로 부정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노동을 하면서 안전을 위협당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회는 오히려 쉽게 가해자를 동정한다는 것을. 아픈 사람이 병원에서 쫓겨날 수 있고, 학업 성적이 나쁘거나 가난하면 어른들이 쉽게 보호를 철회할 수 있다는 것을. 그처럼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못한 일들을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후각이 열리는 그의 아름다운 문체를 통해.
어둠을 통해 삶의 긍정을 보는 사람들
이 책 안에는 작가 지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살아생전 모습뿐 아니라 죽음의 양상이 어떠했는지가. 그 지인들은 평범한 청년들이었을 뿐인데, 신문 사회면 기사로 등장하곤 했다. 작가는 올해 들어 벌써 네 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친구 ‘하나’는 눈이 예쁘고 체구가 작았다. 그 작은 몸은 그러나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 쉬운 말은 하지 않았고 약한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저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갈 일이 있었다. 출국 전날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하나가 죽었어”라며 부고를 전했다. 수술비 때문에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하나는 손님과 2차를 나갔는데 행방이 묘연해졌고, 그 후 상반신이 불에 탄 채 발견됐다. 하지만 이후 범인이 잡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작가는 세상이 그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알고 보니 하나는 HIV 감염인이었고, 그녀의 부모는 자식이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모든 이야기의 경로를 차단했다. 그때 작가는 결심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언젠가 내가 꼭 하나의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들려줄 거야.”
한때 한국의 트랜스젠더 상당수가 일본 삿포로, 신주쿠, 요코하마, 나고야, 후쿠오카로 건너가 성노동을 했다(현재는 일본 경기가 안 좋아 동남아인들이 한다고 한다). 이들은 그곳에서 ‘미스 코리아’라고 불렸는데, 수시로 살해 협박에 노출되곤 했다. 하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저자는 하나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하나를 드러내어 각인시키고 싶고, 동시에 무명으로 사라지는 동료 감염인들에게 이름을 되돌려주고 싶어 자신에게 남은 에이즈 치료제와 주변 HIV 감염인들에게서 얻은 약을 녹여 캔버스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세상의 수많은 이은주들
이 책에서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이은주라는 인물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작가는 어머니 이름 이은주를 빌려와 자신에게 말 걸도록, 이야기를 끌어내도록 만든다. 책에 서술되는 그녀의 생은 사실 그녀 자신의 것도 있고, 아들 이정식의 것도 있으며, 일부는 주변인의 것들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서 봤으면 하는, 주변에서 직접 목격한 마이너한 삶들을 작가는 ‘이은주’에 담아놓았다.
그녀는 한때 술집에 일을 나간 적이 있다. 거기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렸다. 손님들 앞에서는 외모와 대기 줄의 순서대로 1번, 2번, 3번이라 불렸던 것이다. 대기실의 빨간 소파는 담뱃불이 떨어져 구멍이 숭숭 나 보기 흉했고, 방 안은 늘 담배 연기로 자욱했으며, 가늘고 높은 허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이은주는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건 물론 그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게 밖을 나서는 순간 서로를 지워야 좋을 관계니까.
그곳에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마음은 반대로 손님에게 호명될까봐 늘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지하의 가게를 찾아온 남자들의 얼굴과 그들 특유의 시선에서는 습한 냄새와 맡기 싫은 냄새가 같이 떠올랐다.
한강을 바라보면 자살충동을 느끼곤 했던 이은주는 한때 고시원에 살기도 했다. 그녀는 경제적인 고립이란 단순히 못 먹고 못 마시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점차 웃을 일이 사라지고 굳어버리는 얼굴 속에 마음은 늘 누군가를 향해 날카로움을 품는 것이라고 한다. 그 시절 그녀는 거울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거울 속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고.
사회에서 호명되지 못한 김무명의 삶들
책 2부에 나오는 8명의 김무명들의 삶은 주목할 만하다. 1964년생부터 1993년생까지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다. 7명은 현재 감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2015년에 고인이 되었다. 수동연세요양병원이란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치료해준다고 하는데, 사실상 치료는 거의 없고 갇혀서 돌봄을 행하는 이들로부터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2015년에 죽은 김무명이 바로 이곳에 있다가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가 목숨을 저버린 사람이다.
8명의 목소리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게 된다. “감염된 이후에는 자살을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 내가 죽고 나면 엄마가 내 감염 사실을 알아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엄마에게 HIV에 감염된 자식을 둔 게 나을까, 자살한 자식을 둔 게 나을까. 둘 중 슬픔의 무게는 어떤 게 더 무거운 걸까. 더 가벼운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난 엄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거든.”(1985년생, 2017 HIV 양성)
“하나님께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질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란함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지만 횟수로 문란함을 말할 수 있다면 전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전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당신의 이름을 충실히 불러왔습니다. 제 과거에 잘못이 있다면 다시 한번 바로잡을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1989년생, 2016 HIV 양성)
1988년생으로 2016년에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여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내 남자친구가 날 감염시킨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내 남자친구까지 감염시켜버린 것은 아닐까. (…) 누가 누굴 감염시켰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그 사람이 감염되었다면, 감염인으로 살아간다면 약은 잘 먹고 있는지 걱정될 뿐이에요.” 1992년생 감염인(2009 HIV 양성)의 말처럼 감염인들 사이에서도 소수자가 있다. “여성 감염인분들을 위해선 가끔 기도해. 그들은 감염인들 안에서도 소수니까. 같은 감염인이라고 하지만 여성 감염인들은 더 힘들고 고통이 큰 거 같아서.”
HIV 감염인들은 대부분 누가 나를 감염시켰는가에 대해 따지지 않고, 어떻게 이 삶을 이어갈까를 모색한다. 물론 이정식이 고백하듯 HIV 감염은 “사람을 혼자 남겨지도록 하는 병. 사람과의 만남을 잊도록 만들게 하는 병. HIV는 외로움의 질병”이다. 이들은 그럼에도 사랑의 방식이 달라질지언정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는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삶의 무대로 돌아가 몸을 쓰고 땀을 흘리면서 감염 이후의 시간에서 자기 생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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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1987년 대전 출생. 서울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텍스트를 쓴 후 이를 출판, 영상, 설치 작업 등으로 제작한다. 《숨바꼭질: 눈길, 귀엣말》 《넥스트코드》 《이정식》 《김무명》 《NOTHING》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발,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포럼 등에 영상 작품을 출품했고, 2018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예술영화 제작지원 다큐멘터리 단편 신인 부문에 선정됐다. 지금은 군피해치유센터 어머니들을 인터뷰 중이다. 그중 일부가 『에픽』 2021년 여름호에 실렸고, 향후 이 주제로 전시를 열 예정이다. PL(People Living with HIV/AIDS)이라는 상황에 놓인 그는 “사회적 소수자와 같이 통속적이고 전형적이기 쉬운 소재들에 구심의 강도를 더하고 호소력을 얻는” 작품들을 선보인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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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의 글
분노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 나영정 인권활동가
시선으로 사람을 살릴 수는 없지만: 고통과 외로움의 연대로서 글쓰기 | 남웅 퀴어활동가
1부 이정식과 주변 사람들의 생
바다의 입
어떤 문장들이 쓰여 있는 걸까
편지
계단을 올라가면
검은 얼굴
2부 김무명
1985년 출생. 2017 HIV 양성
1989년 출생. 2016 HIV 양성
1988년 출생. 2016 HIV 양성
1993년 출생. 2017 HIV 양성
1982년 출생. 2009 HIV 양성
1968-2015
1966년 출생. 2004 HIV 양성
1964년 출생. 2010 HIV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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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책 속에서
새벽 세 시의 평일이었다. 손님이 없어 가게 문을 일찍 닫은 날에 나는 차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언덕의 오르막길을 걸어가면서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신발을 벗고 바닥 위로 쓰러져 누워버리고 싶었다. 섬유질의 종이가 되면 어떨까. 종이가 돼서 종이파쇄기로 걸어 들어가 누군가 나를 읽지 못하도록 흔적들을 지워버리자._52쪽
지친 몸과 마음에 필요한 건 타인의 간섭이 없는 혼자만의 공간이고 이 공간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고 듣지 않아야 한다. 마치 눈이 먼 것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 일이 아닌 타인의 문제에 대해 갖는 관심은 쌓인 피로감을 가중시킬 뿐이니까. 그것이 사회와 나를 단절시키고 고립시키는 것을 모르는 사이에 침묵을 선택하면서 말이다.
얼마나 쉬웠던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말하고 눈길을 거두는 것은. 마음을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했던 일들은._58쪽
밤에 일한다는 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둡고 지저분한 그늘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서 일하는 많은 누나와 친구, 동생들은 저마다 꿈을 꾸며 미래를 위해 현실을 영위해나가요. (…) 바깥의 시간에 무감해지고 유리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여기에도 웃음이 있고 눈물도 있어요. 제 친구가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나요. 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본 적이 있어. 어둠 속에만 있었다면 몰랐을 거야. 지금은 편안하다고. 어쩌면 사람들은 밤에 일하는 사람들의 그늘만을 보기 때문에 모르는지도 모르겠어요. 여기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떠난 사람들을 생각해요. 사회에서 호명되지 못하는 죽음들을요. 밤에 일한다는 건 그런 죽음들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 일이기도 해요. 전 올해에만 벌써 네 번의 부고 소식을 들었어요._77쪽
감염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아. 단지 감염 이후의 시간, 처음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난 그들에게 말하고 싶어. 어리광 부리지 말라고. 징징대는 거 보기 싫다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도 없을 거야. 그래도 여성 감염인분들을 위해선 가끔 기도해. 그들은 감염인들 안에서도 소수니까. 같은 감염인이라고 하지만 여성 감염인들은 더 힘들고 고통이 큰 거 같아서. 그들을 위한 기도는 가끔 하는 거야._148쪽
추천사
HIV 감염인 당사자로서 자신을 드러낸 이는 자신의 문장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싣는다. (…) 학제의 연구와 다른 방식의 실천은, 외로움과 고통으로부터 개인을 구제할 수 없지만 삶의 윤곽을 살피며 외로움과 고통의 사회적 구조를 거슬러 읽도록 한다. 그의 글쓰기를 좇으며 가난과 외로움과 고립의 문장들이 어떻게 제 동료를 만나고 기억하며 단단해지는가를 확인한다. 타인에게 제 자리를 양보하듯 자신의 문장을 채우는 방식은 그만의 이야기도, 상대의 이야기만도 아닌 행간의 메아리로, 외로움과 고통을 잇는 연대의 글쓰기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문장들은 ‘외로움의 질병’을 안고 있음에도 타인의 삶과 주파수를 맞춘다._남웅 미술·시각문화 평론가, 퀴어활동가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당하게 때로는 기쁘게 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대답을 원천적으로 부정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사람과 나의 대답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관계 맺는 이야기를 짓는 이야기꾼 이정식은 무엇이든 정확하고 자세한 언어로 설명해주지만, 듣는 이의 대답을 누구보다 더 강렬하게 기다린다. (…) 혐오의 언어가 구체화되고, 그것이 착취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게 하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들어보지 않은 이야기, 상상해보지 못한 삶에 가까이 다가가 연루되는 것이라고 믿는다._나영정 퀴어 페미니스트, 인권활동가
가출 청소년, 빈곤, 동성애 혐오, 교도소, HIV 낙인……
사회에서 호명되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
그들을 불러내 빛을 비추는 삶에 관한 이야기
감염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HIV 감염인들의 삶을 작품으로 만들다
그간 많은 매체에서 이정식 작가를 인터뷰하며 그의 생각과 작품 활동이 드러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무언가 입 밖으로 말하는 순간, 그의 이미지를 소비하거나 그에게 덧씌워진 낙인을 더 강화하는 일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설명하자면, 이정식은 10대 시절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 집을 나와 시설에서 지냈던 가출 청소년이고, 빈곤한 삶을 살면서 장애인 활동보조를 했으며, 동성애 혐오의 시선과 언어들을 감내하면서 이를 시각언어 작품으로 승화시켜왔고, 병역거부로 교도소 생활을 했다. 2013년에는 HIV/AIDS 양성 판정을 받은 뒤 이를 감추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바로 이 책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을 통해서다. 미술 작가에게 1인칭 에세이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 수 있다. 자기주장보다 예술을 통해 관객이 경험하고 판단력을 얻도록 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의 욕망은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강력한 힘이 있다. 새로운 관계를 맺길 바라고, 이야기를 하는 데 능한 작가는 자기 어머니(이은주)를 인터뷰이로 내세워 자신을 인터뷰하게 만들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엄마가 되고 엄마가 자신이 되어 독자들에게 상상해보지 못한 삶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든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한 번도 내 삶이 아니었던 것을 경험하거나, 혹은 당사자로서 사회 밖으로 밀려나 체계 안으로 편입되지 못했던 자신을 안으로 끌어당겨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살면서 사회로부터 원천적으로 부정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노동을 하면서 안전을 위협당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회는 오히려 쉽게 가해자를 동정한다는 것을. 아픈 사람이 병원에서 쫓겨날 수 있고, 학업 성적이 나쁘거나 가난하면 어른들이 쉽게 보호를 철회할 수 있다는 것을. 그처럼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못한 일들을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후각이 열리는 그의 아름다운 문체를 통해.
어둠을 통해 삶의 긍정을 보는 사람들
이 책 안에는 작가 지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살아생전 모습뿐 아니라 죽음의 양상이 어떠했는지가. 그 지인들은 평범한 청년들이었을 뿐인데, 신문 사회면 기사로 등장하곤 했다. 작가는 올해 들어 벌써 네 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친구 ‘하나’는 눈이 예쁘고 체구가 작았다. 그 작은 몸은 그러나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 쉬운 말은 하지 않았고 약한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저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갈 일이 있었다. 출국 전날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하나가 죽었어”라며 부고를 전했다. 수술비 때문에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하나는 손님과 2차를 나갔는데 행방이 묘연해졌고, 그 후 상반신이 불에 탄 채 발견됐다. 하지만 이후 범인이 잡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작가는 세상이 그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알고 보니 하나는 HIV 감염인이었고, 그녀의 부모는 자식이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모든 이야기의 경로를 차단했다. 그때 작가는 결심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언젠가 내가 꼭 하나의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들려줄 거야.”
한때 한국의 트랜스젠더 상당수가 일본 삿포로, 신주쿠, 요코하마, 나고야, 후쿠오카로 건너가 성노동을 했다(현재는 일본 경기가 안 좋아 동남아인들이 한다고 한다). 이들은 그곳에서 ‘미스 코리아’라고 불렸는데, 수시로 살해 협박에 노출되곤 했다. 하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저자는 하나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하나를 드러내어 각인시키고 싶고, 동시에 무명으로 사라지는 동료 감염인들에게 이름을 되돌려주고 싶어 자신에게 남은 에이즈 치료제와 주변 HIV 감염인들에게서 얻은 약을 녹여 캔버스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세상의 수많은 이은주들
이 책에서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이은주라는 인물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작가는 어머니 이름 이은주를 빌려와 자신에게 말 걸도록, 이야기를 끌어내도록 만든다. 책에 서술되는 그녀의 생은 사실 그녀 자신의 것도 있고, 아들 이정식의 것도 있으며, 일부는 주변인의 것들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서 봤으면 하는, 주변에서 직접 목격한 마이너한 삶들을 작가는 ‘이은주’에 담아놓았다.
그녀는 한때 술집에 일을 나간 적이 있다. 거기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렸다. 손님들 앞에서는 외모와 대기 줄의 순서대로 1번, 2번, 3번이라 불렸던 것이다. 대기실의 빨간 소파는 담뱃불이 떨어져 구멍이 숭숭 나 보기 흉했고, 방 안은 늘 담배 연기로 자욱했으며, 가늘고 높은 허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이은주는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건 물론 그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게 밖을 나서는 순간 서로를 지워야 좋을 관계니까.
그곳에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마음은 반대로 손님에게 호명될까봐 늘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지하의 가게를 찾아온 남자들의 얼굴과 그들 특유의 시선에서는 습한 냄새와 맡기 싫은 냄새가 같이 떠올랐다.
한강을 바라보면 자살충동을 느끼곤 했던 이은주는 한때 고시원에 살기도 했다. 그녀는 경제적인 고립이란 단순히 못 먹고 못 마시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점차 웃을 일이 사라지고 굳어버리는 얼굴 속에 마음은 늘 누군가를 향해 날카로움을 품는 것이라고 한다. 그 시절 그녀는 거울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거울 속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고.
사회에서 호명되지 못한 김무명의 삶들
책 2부에 나오는 8명의 김무명들의 삶은 주목할 만하다. 1964년생부터 1993년생까지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다. 7명은 현재 감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2015년에 고인이 되었다. 수동연세요양병원이란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치료해준다고 하는데, 사실상 치료는 거의 없고 갇혀서 돌봄을 행하는 이들로부터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2015년에 죽은 김무명이 바로 이곳에 있다가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가 목숨을 저버린 사람이다.
8명의 목소리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게 된다. “감염된 이후에는 자살을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 내가 죽고 나면 엄마가 내 감염 사실을 알아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엄마에게 HIV에 감염된 자식을 둔 게 나을까, 자살한 자식을 둔 게 나을까. 둘 중 슬픔의 무게는 어떤 게 더 무거운 걸까. 더 가벼운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난 엄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거든.”(1985년생, 2017 HIV 양성)
“하나님께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질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란함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지만 횟수로 문란함을 말할 수 있다면 전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전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당신의 이름을 충실히 불러왔습니다. 제 과거에 잘못이 있다면 다시 한번 바로잡을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1989년생, 2016 HIV 양성)
1988년생으로 2016년에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여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내 남자친구가 날 감염시킨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내 남자친구까지 감염시켜버린 것은 아닐까. (…) 누가 누굴 감염시켰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그 사람이 감염되었다면, 감염인으로 살아간다면 약은 잘 먹고 있는지 걱정될 뿐이에요.” 1992년생 감염인(2009 HIV 양성)의 말처럼 감염인들 사이에서도 소수자가 있다. “여성 감염인분들을 위해선 가끔 기도해. 그들은 감염인들 안에서도 소수니까. 같은 감염인이라고 하지만 여성 감염인들은 더 힘들고 고통이 큰 거 같아서.”
HIV 감염인들은 대부분 누가 나를 감염시켰는가에 대해 따지지 않고, 어떻게 이 삶을 이어갈까를 모색한다. 물론 이정식이 고백하듯 HIV 감염은 “사람을 혼자 남겨지도록 하는 병. 사람과의 만남을 잊도록 만들게 하는 병. HIV는 외로움의 질병”이다. 이들은 그럼에도 사랑의 방식이 달라질지언정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는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삶의 무대로 돌아가 몸을 쓰고 땀을 흘리면서 감염 이후의 시간에서 자기 생을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