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서술에서 1930년대 말~1940년대 초는 ‘암흑기’로 불린다. 일본 식민 지배의 마지막 십 년 동안 한반도에 살았던 시인, 철학자, 소설가, 저술가 들은 전쟁과 파시즘의 광풍 속에서 민족의 미래를 더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주체와 객체,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철저하게 결박되고 분열된 상황은 역설적으로 세계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모더니즘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 모더니즘은 사라지는 미래에 직면한 식민지 부르주아 주체들이 펼치는 상상의 고투였다.
컬럼비아대학에서 한국 근대 모더니즘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넷 풀은 한국문학과 문화사, (탈)식민주의와 모더니즘 미학을 연구하는 학자이면서 이태준 등의 수필과 소설을 영어로 소개해온 한국문학 번역자이기도 하다. 서양 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모더니즘 연구인 이 책은 몇 가지 흥미로운 특이점이 있다.
첫째, 식민 말기 한국 모더니즘을 서양 모더니즘의 영향하에 있던 아류적 현상으로 보지 않고 당대 세계 모더니즘과 파시즘의 문화사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수평적으로 다룬다. 세계적인 모더니즘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독창적인 미학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에서도 이천년대 들어서야 연구가 본격화한 식민 말기, 그중에서도 특히 해방 이후 북한으로 향한 작가들을 주로 논한다. 이태준, 박태원, 최명익, 임화, 오장환, 김남천 등은 대개 해방 이후 월북했거나 북한에 남았던 이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1980년 후반까지도 남한에서 출판 금지되었다.
셋째, 글쓰기 형식 면에서 일화적 수필, 비평, 단편소설 같은 ‘비주류’ 장르에 주목한다. 당시 시대상과 작가들의 심상이 이런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글쓰기 형태에 각인되고 투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분열된 주체들의 모더니즘적 상상력
식민 말기 상황에서, 미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일본의 식민 통치가 본격화하기 시작하는 1900년대 초에 태어났다. 그들은 식민지 이전 사회에 대한 기억이 없었으며, 일본에 유학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1930년대에는 조선어 매체가 번성했고, 전업작가들이 생겨날 만큼 출판 시장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예컨대 이태준은 식민지에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작가였다. 단편소설과 문장 작법을 쓰고 신문 학예면 편집자로 일하며 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기도 한 이태준은 가족을 부양하면서 우아한 생활을 누릴 만큼 충분히 돈을 벌었다.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작가들도 모두 부르주아 주체들이다. 그들은 시장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면서도 시장의 혜택을 누렸으며, 조선어를 통해 민족문화 관념에 고취되었으나 실상 제국의 뒤편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시행된 일제의 황민화 정책으로 상황은 급변한다. 1940년에 조선어 매체가 폐간되면서 시장 및 정치로부터의 자유는 사라졌다. 발표 지면이 급감했고, 이제 대부분의 작가에겐 일본제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것만이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세계 식민주의 역사를 통틀어, 식민지의 언어가 근대가 되어서도 살아남았다가 국가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폐지된 사례란 거의 없다.”(37쪽) 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어는 점차 사라져갈 운명에 처했다. 이에 대한 작가들의 대응은 새로운 언어로 혁명적 이상을 고취하겠다는 태도부터 파시즘에 대한 전면적인 승인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 시기 문단에는 파편적이고 삽화적이며 순환적인 구조를 갖춘 단편소설, 시, 수필 형식이 부상했고, 데카당스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개인과 민족 앞에 드리운 짙은 어둠 앞에서 작가들은 현재와 일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소설도 개인사와 가정사의 영역에 눈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