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론을
시인·평론가·연구자·교육자 정끝별이 집대성한 현대시론
시집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로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이자, 『파이의 시학』 『패러디 시학』 『시심전심』 등을 펴내며 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해온 정끝별이 시력 30여 년의 세월을 집대성한 『시론』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다. 시인, 평론가, 연구자, 교육자로서의 꿈과 현장 경험과 시행착오를 밑거름 삼아, 지난 30여 년간 꾸준하게 진행·축적해온 ‘경험 시론’을 마침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그 어떤 수식도 붙이지 않은 ‘시론’이라는 순정한 제목은 한국의 현대시와 현대시론과 현대시사와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자 그 어떤 치우침도 없이 시와 시론 그 자체를 다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겠다.
한 분야의 론(論)과 사(史)를 써내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시간 30년. 정끝별의 『시론』은 현대 시론사에서 김춘수, 김준오, 이승훈, 오규원의 계보를 잇는 정통 시론으로, 이는 여성으로서는 처음 자리하거니와 여성 시론 연구자도 시론 자체도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이기에 그 귀함과 반가움은 배가된다. 물론 드묾이 귀함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끝별의 『시론』은 기존의 시론과 깊이 대화하고 때로는 대결하면서, 특유의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꼭 필요한 것들만으로 충분히 방대하게, 새 시대의 새 시론을 제시한다.
시를 쓰고 싶고, 읽고 싶고, 알고 싶은 모두에게
나만의 시를 찾고-갖기 위해 준비된 열두 계단
작가는 “시가 무엇인지 막막할 때,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답답할 때, 어떤 시를 좋은 시라고 해야 하는지 갑갑할 때” 기존의 시론을 뒤적여보았노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인, 비평가, 교육자로서의 깊은 고민은 “시를 쓰고 시를 공부할 때 알아야만 할 기본적인 시적 장치”(서문)들로 구성된 한 권의 책을 쓰고자 하는 마음에 가닿는다. 성찰과 고백, 화자와 목소리, 반복과 병렬, 이미지의 운동성과 영상성, 은유의 맥락성과 구조, 환유와 인접성, 상징과 풍자와 알레고리, 아이러니의 이원화와 다원적 지평, 패러디와 패스티시와 키치, 환상과 그로테스크, 상징과 도상과 형태, 영향과 모방과 표절. 이는 21세기에도 시를 읽고 쓰는 이들을 위해 작은 빛이 되고자, ‘한 편의 시’를 찾고 또 갖게 하고자 정끝별이 마련해놓은 시의 열두 계단이다.
『시론』은 어느 한 주제나 시론, 사조에 기울지 않고 시에 관한 한 꼭 필요한 요소들로만 구성한 조화와 균형에 그 탁월함이 있다. 정끝별은 각 장마다 기존 시론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바탕으로 시에 작동하는 원리, 실제 시 분석을 통한 정의, 기능 및 실현의 실제, 유형 분류, 실현과 전개 양상을 꼼꼼하게 살핀다. 또한 각 요소를 설명함에 있어 익숙한 개념이라고 하여 허투루 짚고 넘어가지 않으며, 쉬이 규명되지 않는 개념이라고 하여 추상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는 성실함을 선보인다. 그중에서도 시 창작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고백’과 ‘표절’ 파트는 시인 정끝별의 정체성이 가장 묻어나는 장으로, 그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발아-발화의 시작 지점과 고백의 원리를 시인의 내밀한 목소리로 건넨다. 또한 신인과 기성을 막론하고 난색일 수밖에 없을 표절에 관해서도 모방의 다양한 양상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명쾌함을 선사함과 동시에 시를 시이게 하는 시적 자세와 태도를 역설하고, 창작은 발명이 아닌 발견이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정직한 고백은 아프다. 고백은 정직을 목표로 하고, 정직이 죄와 거짓과 비밀로부터 발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백의 끝은 누추할 때가 많다.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해야 하는 역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이 통과해온 시간의 퇴적물, 이를테면 체험이나 기억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로 인해 고백은 밑바닥의 시간 혹은 상처의 시간을 들춰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 들춰냄이 고통스러운 또다른 이유는, 감추면서 드러내야 하는 고백의 역설을 정직한 시선과 미적인 언어형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데 있다. _15~16쪽, 「내적경험과 성찰로서의 고백」에서
기존의 시론에 없었던 ‘패러디, 패스티시, 키치’, 시대와 발맞춘 ‘이미지’, 기성 시론에서 마치 블랙홀과 같았던 ‘은유와 환유’에 대한 정끝별의 집요한 분석과 탐구는, 이미 시와 시론에 익숙한 독자에게도 『시론』을 통해 시 세계를 갱신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작가의 장기라고 볼 수 있을 ‘리듬’에 대한 해박하고도 유려한 글 전개는 시 읽기의 기쁨을 상기하게 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아이러니’에 대한 새로운 접근, ‘환상과 그로테스크’의 재평가를 통해 시적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케 하는 자리 역시 마련한다.
“시란 결국, 시 자체이면서 현실 전체일 것이다.”
바야흐로, 지금-이곳의 21세기 시론
시를 향한 열두 계단 마디마디, 각 요소를 충분히 체화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윤동주, 백석에서부터 진은영, 백은선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에서부터 21세기 새로운 시의 양상을 설명하기 위한 낯설지만 중요한 시인들의 작품이 맞춤하게 실려 있다. 『시론』의 큐레이션 자체가 한 권의 현대시 앤솔러지이자, 『시론』을 읽는 이가 익히고-차별화해-꼭 넘어서야 할 작가들의 목록까지 구비된 셈이다. 시가 도약의 예술이듯 『시론』 속에는 뛰어넘어야 할 기성의 시와, 이를 위해 디딤돌이 되어줄 시의 징검돌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잃어버린 황금종을 찾아 헤매다 종이 있다는 섬에 도달했을 때, 거기서 발견한 것은 그 ‘섬 전체가 종’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성복 시인의 산문에서 읽었던 비유담이다. 시도 그렇다. 시란 결국, 시 자체이면서 현실 전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현실 전체를 볼 수 없고, 전체를 볼 수 없으니 모든 걸 다 담아낼 수도 없다. 그러니 다르게 보고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발견으로서의 시, 시의 알레프, 한 편의 시(책)의 비유담들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잃어버린 황금종의 비유담이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불가능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_384쪽, 후기에서
지금-이곳에 착 달라붙어서 쓴 시론. 꼭 필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시론. 현장과 이론의 장을 자유자재하게 넘나들며 마름질한 시론. 그리하여 시를 읽고, 쓰고, 가르치는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는 시론. 작가는 이 책을 행운에 빚진 ‘가까스로’의 시론이라 표현했지만, 이를 이제 한창 또는 지금 바로를 의미하는 ‘바야흐로’의 시론으로 바꾸어 읽는 건 어떨까. ‘나만의 시-한 편의 시’에 다다르게 할 바야흐로의 『시론』을 드디어 만나볼 시간이다.
■ 작가의 말
그리하여 시를 향해
리듬은 말을 걸고, 비유들은 손가락을 걸고, 이미지는 마술을 건다.
그러니 시는 세상에 말을 걸고 그 말에 손가락을 걸고 그 손가락에 마술을 건다.
화자는 시인을 걸고, 아이러니는 딴지를 걸고, 패러디는 수작을 건다.
그러니 시는 세상에 다른 나를 걸어놓고 다른 나를 향해 딴지를 걸고 그 딴지에 수작을 건다.
이렇게 걸고 걸며,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밑그림을 그려주는 책이었으면 한다.
2021년 여름에
정끝별
■ 책 속에서
나는 ‘나의 알레프’를 발견하고 싶었고, 알레프를 통해 본 세계를 ‘한 편의 시’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런 시는 마치 섬광과도 같이 시의 안팎을 동시에 내리치거나 때로는 목숨과도 맞바꿔야 하는 강력한 불꽃의 언어일 것만 같다. 그것이 비단 나만의 꿈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과 이 세계 전부를 언어 구조물로 담아내려는 모든 시인의 궁극일 것이다. _6쪽, 서문에서
모든 시는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를 스스로 암시한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즐겨 쓰는 어휘나 시적 표현, 호흡과 리듬, 목소리와 구문의 패턴 등이 들어오고, 읽고 또 읽다보면 누구의 시인지, 어느 시기의 작품인지도 알게 된다. 이러한 읽기의 축적이 시론의 밑돌이고, 축적된 시에 관한 규칙과 창의성의 총합이 시론이다. 시론은 시 장르의 규칙과 기본에서 시작해 발명과 개선으로 완성되고, 시인의 방법적 선택에서 시작해 독자의 해석적 선택으로 완성된다. _7~8쪽, 서문에서
시는 목소리들이 집결되는 기관이자 목소리들이 거주하는 거처다. 이런 목소리는 성별, 성격, 인격 등을 비롯해 어조, 리듬, 장단, 심지어 이미지나 비유에도 영향을 미쳐 개성적인 성색(聲色)을 빚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화자를 파악하는 일이란 곧 목소리를 이해하는 일이다. 시의 화자를 선택하고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빚어내는 일은 시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개성적인 목소리들의 출현과 더불어 창조적인 화자의 기능에 관한 관심은 새로운 시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_33~34쪽, 「창조적 화자와 다성의 목소리」에서
이미지는 주로 시각 이미지를 지칭하지만 그렇다고 이미지를 시각 포함의 감각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이미지란 감각이자 경험이고, 물질이자 상상이다. 기억이자 사유고, 정동이자 정치다. 또한 그림이나 사진처럼 순간적으로 정지된 것이면서, 영상이나 홀로그램처럼 지속해서 움직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에 관한 연구 또한 감각적인 것과 사유적인 것, 매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들 사이에서 실현되는 인간의 모든 표현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이미지 역시 재현과 표현, 신체와 물질, 감각과 상상, 기억과 자유, 순간과 지속, 정지와 운동,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실현체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_93쪽, 「이미지의 운동성과 영상화된 이미지」에서
은유는 맥락적이고 구조적이다. 현대시에서 은유가 어렵다고 느끼는 데는 그 원관념을 찾기 어려운 이유도 있지만 대부분은 은유적 해석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서다. 은유의 의미는 상황과 문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단어나 어구, 문장, 언술 구조, 나아가 행과 연, 제목이나 텍스트 밖의 외적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은유와 은유, 은유와 다른 비유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원관념의 의미가 맥락적으로 생성되고 구조화된다. 하나의 은유는 텍스트의 문맥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직유, 환유, 알레고리, 상징 사이를 오가며 그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따라서 은유는 부정(不定)이자 부정(否定)인 열린 체계라 할 수 있다. 은유를 텍스트의 전개에 따라 독서 과정에서 변화하는 역동적 형태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_131~132쪽, 「명명에서 구조로 확장되는 은유」에서
타자성과 하위 장르의 전복적 부상, 비이성과 광기에 대한 새로운 조명, 불확실한 리얼리티의 확산 등에 힘입어 환상문학은 21세기 문학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단순하고 개연성 없는 공상 오락물로 폄하되었던 변신과 환생, 마법과 주술, 좀비와 귀신과 인공지능 로봇 모티브 등은 문학뿐 아니라 영화나 대중음악, 광고, 패션 등 모든 문화영역에서 쉽게 발견된다. 사실과 환상과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상을 이제는 20세기적 개념의 ‘있는 그대로’, 즉 ‘리얼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있는’이나 ‘리얼’의 조건 안에 환상(가상)의 일정 지분을 인정해야 한다. _297쪽, 「환상과 그로테스크의 연금술」에서
표절을 현대시 안으로 끌어들였을 때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시에서 표절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言衆)들은 공통된 기억의 조합물과 공통된 사회문화적 생산물을 공유하는데, 이런 조건 속에서는 감정 또한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모든 시는 앞선 시들과의 영향 관계 속에서 창작되는데, 앞선 시들이 뒤를 잇는 시들을 억압하는 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시 창작 행위가 선행 시에 대한 독서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든 시는 잠재적인 표절 텍스트이고 모든 시는 이미 쓰여졌다고도 할 수 있다. 창작이란 발명이 아닌 발견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한다. _354쪽, 「표절과 영향·모방의 위태로운 경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