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리움을 신이 죽은 자리라 부르자”
삶도 죽음도 아닌 중유(中有)의 세계에서
나를 이루는 상실을 마주하는 백지의 마음
문학동네시인선 157번째 시집으로 박지웅 시인의 『나비가면』이 출간되었다. 말을 통해 존재론적 비의를 행하는 시인, 형이상학적 관념을 자연물을 통해 구체화하고자 하는 시인. 말에 대한 집요하고 처절한 자의식으로, 실존의 투쟁 방식으로서의 쓰기를 멈추지 않는 시인. 『나비가면』은 지리산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을 수상한 박지웅의 네번째 시집이다. “새는 긴 가지를 물어 구름과 집 사이에 걸었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와 같은 문장이 환기하는 것처럼, 알레고리를 통해 단절된 듯 보이는 사물들 사이에 놓인 연결 지점들을 발견해온 그는 이번 시집에 이르러서는 존재와 존재의 거리를 재조정하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허공에 그리움의 자리를 마련한다. 1부 ‘가끔 다 타지 않은 편지가 나왔다’, 2부 ‘별로부터 나는 얼마나 오랜 뒤의 일인지’, 3부 ‘검은 하느님이 달아나고 있다’, 4부 ‘누군가 물속에서 등잔불을 흔들듯’으로 이어지는 79편의 시들은 결국 그 거리, 자신과 세계와의 간극을 인지하고 그 앎을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환원하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수룩한 개는 아무거나 주워먹었다
쥐약과 건넛산에 놓인 달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달이 어렴풋이 뒤뜰에 지면 홀린 듯 달려갔다
(…)
잠자리에 들 때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핏발 선 꽃들, 힘세고 오래가던 어지럼들
닭 뼈다귀를 화단에 던져주면
수국은 혈육처럼 그러안고 밤새 핥는 것이었다
_「흰색 가면」 부분
책장을 넘기면 첫번째로 만나게 되는 시 「흰색 가면」에서부터 우리는 처절하리만치 강렬한 그리움의 정서를 맞닥뜨린다. 어쩐지 박지웅이 그려내는 그리움은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온기어린 애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럼’이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며 닭 뼈다귀로 형상화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그에게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먹은 그리움에는/ 왜 뼈가 나올까”(「꽃무늬 흉터」)라고 말하는, 물리적 실체로서 감정을 감각할 줄 아는 시인의 낯선 언어는 익숙한 듯했던 감정을 재인식하게 한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생을 이루는 것들을 감각하는 시인의 운명은 「놋쇠황소」에서 알레고리 형태로 나타난다. “옛 팔라리스왕은 나를 놋쇠황소에 집어넣고/ 배 밑에 장작을 쌓았다 불을 땠다/ 내 몸에 있는 춤을 모조리 꺼내었다/ (…) / 오래전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에 반대하였다”. 고문기구인 놋쇠황소는 그 안에 갇힌 사람의 비명이 웅장한 저음으로 울려나오도록 설계되었는데, 이 잔혹한 형틀에서 첫번째로 죽임을 당한 자는 다름 아닌 기구를 설계한 페릴루스였다. 그의 비명이 아름다운 음악처럼 웅장하게 흘러나왔다는 점에서 놋쇠황소는 예술가의 운명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얘기되곤 한다. 우리에게 익숙할 수 있는 감정들을 누구보다 깊게 느끼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시인의 운명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이러한 연유로, 박지웅에게 시쓰기란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을 동반한 모든 정념이 해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것은 결국 한 사람을 이룩하는 자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시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하다.
청춘은 성냥개비 같은 어깨를 가졌지요
스치는 대로 불이 붙는 곳이었지요 손짓 한번 조심스럽던 날들 이토록 감싸는 건 내게 당신이라는 훌륭한 불행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_「훌륭한 불행」에서
지금도 슬픔과 햇볕을 잘 구분하지 못해요
문틈에 서 있거나 눈을 찌르거나 엉겁결에 안고 잠드는 투명한 거잖아요
_「흉」에서
시인은 이러한 마음으로 고통과 슬픔과 상실을 받아들인다. 상실은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쌓아가는 것이라는 자의식이 시집 전반을 통해 엿보인다. 그동안 시인의 시집에 끊이지 않고 등장한 ‘나비’라는 오브제는 『나비가면』에서 상실의 미학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제목부터 사뭇 중의적인 표제시에서 우리는 “나비가 지고// 첫눈에 빠지는/ 사람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라는 시구를 발견하게 된다. 여러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운 이 짧은 시구를 통해 우리는 상실의 구체화된 이미지를 잠시나마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집의 말미, 「함석지붕 원고」에 이르면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저 빛나는 획순을 따라나선 당신의 문장에서 이 모든 꿈이 시작되었지요 어떤 고래는 구름의 전생을 거쳐 폭우가 됩니다 함석지붕 위로 고래 한 마리가 울며 지나갑니다 저 울음이 나의 서식지입니다 빛에서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나는 비문으로 아무렇게나 흐르겠지요 괜찮습니다 죽은 손이라도 흔들어 나를 불러주세요 내 손가락들도 해저에서 높이 떠오를 것입니다
_「함석지붕 원고」에서
“저 울음이 나의 서식지”라고 말하며 “나는 비문으로 아무렇게나” 흘러도 괜찮다고 하는 시인. 하지만 “죽은 손이라도 흔들어 나를 불러”달라고, 그러면 내 손가락들도 “해저에서 높이 떠오를” 것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하는 시인의 마음이 비단 시인 혼자만의 마음뿐일까? 타인의 문장에서 고통과 아름다움과 상실과 그리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박지웅의 ‘어지럼’과 ‘슬픔’과 ‘훌륭한 불행’이 내심 반갑게 느껴진다고 해도 미안해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