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027
윤흥길 대표중단편선 꿈꾸는 자의 나성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제27권은 윤흥길의 대표중단편선 『꿈꾸는 자의 나성』이다. 1960년대 문단에 등장한 뒤로 전후 분단체제와 폭력의 역사에 대해, 근대 산업화 시대의 노동과 소외의 문제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갈등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해온 그는 한국사는 물론이고 시대를 관통해 인간 삶의 모습을 다각도로 형상화해냈다.
『꿈꾸는 자의 나성』에는 윤흥길의 초기와 중기, 후기를 아우르는 대표 중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첫 소설집에 수록된 이후로 윤흥길의 작품세계는 물론 근대 한국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위치한 「장마」(1973)부터 「제식훈련 변천약사」(1975),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 「빙청과 심홍」(1977), 「비늘」(1981), 「코파와 비코파」(1983),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97), 「묘지 근처」(1999),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한 「꿈꾸는 자의 나성」(1982), 21세기문학상을 수상한 「산불」(2000), 「종탑 아래에서」(2003)까지 10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윤흥길 소설의 주요한 성가는 근현대 한국문학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어휘와 문장일 것이다. 지방어의 생생한 입말에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포착하는 지성의 언어에 이르는 풍성하고 정확한 언어는 그가 재현해내는 세계를 보다 명징하고 실체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그와 동시에 윤흥길의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일반적인 사실주의 계보와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위트와 해학이다. 주로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사회와 인간 세계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고자 한 그는 위트와 해학을 통해 강렬한 사회적 현실을 포함하면서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윤흥길 소설은 아마도 근현대 한국문학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어휘와 문장이 구사된 한국어의 보고(寶庫)라는 점만으로도 바래지 않는 성가를 지닐 테다. 지방어의 생생한 입말에서부터 심리적 현실이나 세상의 이치를 포착하는 지성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풍성하고 정확하다. 풍자와 위트, 알레고리와 상징을 넘나드는 작가의 적실한 레토릭은 그 언어들을 소설이라는 또다른 공간으로 옮기면서 현실을 비추는 또다른 세계를 직조한다. (…) 그의 소설이 시대 현실에 대한 직접적 재현을 넘어 징후적 보고報告, 예언적 언어의 힘으로 울리고 있다는 사실은 특별히 기억해둘 만한 일이다. 어느 모로 보나 윤흥길 소설은 전쟁과 분단, 산업화, 정치적 억압의 시대를 통과해온 한국인의 행동과 심성에 대한 대체할 수 없는 탐사의 장이다. _정홍수(문학평론가)
『꿈꾸는 자의 나성』의 작품들은 소시민적 갈등의 진정성을 획득하려는 노력 속에서 낳아진 것들이다. (…) 중요한 것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지향의 끊임없는 쇄신이다. 그것이 결여될 때 비인간적인 사회·조직의 억압과 소시민적 좌절이라는 정태적 구조의 단순 재생산의 되풀이로 귀결되기 쉽고 그때의 소시민적 갈등이란 진정성을 상실한, 그리하여 말의 참뜻에서의 갈등이라 할 수 없는 일종의 도식으로 추락해버리는 것이다. 「꿈꾸는 자의 나성」은 이 맥락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_성민엽(문학평론가)
■ 책 속에서
날이 어두워지면서부터는 입장들이 뒤바뀌어 위로하는 사람과 위로받는 사람을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할머니의 말씨는 주술에라도 걸린 듯이 더욱 암시적이 되고, 어딘지 모르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띠기조차 했다. 반면에 어머니와 이모는 까닭 없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일껏 까려고 가져다놓은 완두 줄거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결국 일감은 외할머니 앞으로 떠넘겨지고, 어머니와 이모는 심란스럽게 앉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중얼거림에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온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난리를 겪고도 용케 살아남은 동네 개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극성맞은 그 포효로 마을을 휩싼 어둠의 장막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장마」, 12쪽)
“어렵다고 꼭 외로우란 법은 없어요. 혹 누가 압니까,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을 아끼는 어떤 이웃이 당신의 어려움을 덜어주었을지?”
“개수작 마! 그따위 이웃은 없다는 거 난 똑똑히 봤어! 난 이제 아무도 안 믿어!”
그는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구두를 보기 위해 전등을 켜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었으나 나는 꾹 눌러 참았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선 다음 부주의하게도 그는 식칼을 들고 왔던 자기 본분을 망각한 채 엉겁결에 문간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의 실수를 지적하는 일은 훗날을 위해 나로서는 부득이한 조처였다.
“대문은 저쪽입니다.”
문간방 부엌 앞에서 한동안 망연해 있다가 이윽고 그는 대문 쪽을 향해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대문에 다다르자 그는 상체를 뒤틀어 이쪽을 보았다.
“이래봬도 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오.”
누가 뭐라고 그랬나. 느닷없이 그는 자기 학력을 밝히더니만 대문을 열고는 보안등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 저편으로 자진해서 삼켜져버렸다.(「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312~313쪽)
날마다 하필이면 왜 이틀 후인가. 엘에이에는 무슨 일로 그처럼 가고자 하고, 거기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낡은 서류 가방은 무엇들로 배가 불러 있으며 가방 주인의 전직 또는 현직은 무엇인가. 수족관 옆자리가 그에게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이며 어째서 공중전화가 없는 허술한 다방의 카운터 전화이어야만 하는가. 그 사내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누구냔 말이오!
그런데 이제 그와 같은 의문들이 나에게 서푼어치의 값어치도 지니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의문마다 수많은 가정을 세우고 그중에서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려던 노력 자체가 송두리째 무효였다. 동기야 어떤 것이든 나하고는 이미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한테는 이제 그가 얻은 지금의 결과만이 중요했다. 한마디로 때려잡아서 그는 낙오자였다. 낙오자이면서 몽상가임에 틀림없었다. 생존 싸움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려는 자에 지나지 않았다. 느닷없는 악몽을 통해서 터득한 나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나는 그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미국에 쫓겨가게 될 입장이었다. 엘에이가 그의 도피처이며 신천지이며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왈칵 떠나지도 못하고 서울과 엘에이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만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 이 세상에서 낙원이란 게 어디 따로 있을라구요.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꿈꾸는 자의 나성」, 477~4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