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 검음, 나의 그림자를 너라 부를까”
고유의 욕망과 한계를 지닌 죽음을 모르는 말들
생의 원초적 활력이 그려내는 압도적인 이미지
관념의 영역을 넘어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물질세계에 들끓고 있는 언어의 박동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문학동네 시인선 161번, 김유태의 첫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고유의 욕망과 육체를 지닌, 죽음을 모르는 말들이 도사리고 있는 소요의 장이다. 그의 시들을 일러 ‘림보로의 초대’라고 한 문학평론가 이철주의 표현을 빌리면 김유태의 시는 “정신의 투명한 거울인 줄 알았던 문자가 어느 날 문득 낯설고 생경한 눈빛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을, 읽을 수 없는 몸을 지닌 관념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악스러운 순간들을 매개하고 촉발한다”. 이 시집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목소리인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 “나의 사랑은 불안이다. 내 눈동자에 짓는 공화국의 율서는 불온한 잠언으로 읽히기를 희망한다. 읽을수록 의지를 상실하는 위험한 외경 한 권이 나의 온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그대로,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에는 우리의 존재를 저 기저에서부터 뒤흔들 준비가 되어 있는, 위태로운 활력과 에너지로 끓어넘치는 44개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기린의 뿔이 떠다니는 방에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냈던 음이 지나가는 중이었고 복도는 기억과 후회로 쌓아올린 벽이었다 마침내 인기척이 없고 뒷모습과 기린의 그림자가 없고 나무도 없는 빈방을 찾아냈을 때 집주인은 부러진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지나왔던 모든 방이 빈방이었다고 여러 개로 쪼개진 모든 방은 시간으로 꿰매진 하나의 같은 방이었다고 입관이 곧 시작된다고
_「임차」 부분
시집의 서두에 놓인 「임차」에서 우리는 여러 차례 감각의 전복을 경험하게 된다. “일사분란하게 모여”드는 그림자와 “알비노 기린 한 마리의 털을 몽땅 잘라 만들었다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색채의 낙차,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냈던 음”과 “인기척이 없”는 방에서 느낄 수 있는 소리의 낙차. 그리고 이처럼 환상적이고 불가능한 감각의 전복 속에서 실은 “지나왔던 모든 방이 빈방”이었으며 “모든 방은 시간으로 꿰매진 하나의 같은 방”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우리는 공존하는 삶과 죽음, 혼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맞닥뜨린다. 이 시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앞으로 펼쳐질 시들의 화자들은 살아 있지만 죽은, 죽었기에 더 생생히 살아 있는 존재의 양극단 사이에서 삶 속의 죽음을, 죽음 속의 삶을 동시에 호흡한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 검음, 나의 그림자를 너라 부를까
덜 아문 칼자국 같은 달
밤새 펄펄 끓던 이마를 우리는 숨긴 채
방금 버려진 꽃을 무덤가 주변에서 한 다발씩 주우며
무릎을 굽힐 때마다, 서로 같은 모양이던 검은 멍을 우리는 함께 문지르면서
_「검은 원」 부분
죽음의 죽음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인간이란 탄원서는 언제나 별 아래에서 울지
나도 서둘러 죽음 곁에 앉아 울어버렸다
_「검은 원」 부분
형상은 수면 아래로 잠기는 한쪽 귀와
아직 잠기지 않은 세상의 눈을 요구한다 반쯤 얼굴을 내민 사과는 죄인의 심장소리를 들려준다
빛과 소리 사이를 흘러가는 강
물의 잔해로 모여드는 흰 사슴떼
_「검은 원」 부분
시집에는 「검은 원」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다섯 편 수록되어 있다. 러시아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동명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 「검은 원」 연작은 추상회화가 매개하는 이미지들의 물성을 시적으로 전유한 시도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시인은 거대한 관념의 중력에 무감한 일상의 감각과 언어를 정면으로 충돌시킴으로써 관성에 젖은 말과 이미지들의 외피를 산산이 부서뜨리고, 채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오래된 말들의 불씨를 읽는 이의 맥동과 숨결 속에 뜨겁게 옮겨놓는다.
죽어가는 새의 명멸을 천천히 확인하는 일
새의 뼈에 일부러 찔려
뼈에 새겨진 이름을 단 한 번만 더듬곤 했던 일
함께 어둡게 죽고
다시 햇빛에 깨어 이름을 잃고 바다에 서는 일
그런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_「죽지 않는 마을」 부분
시집의 표제를 제공한 이 시에서 “함께 어둡게 죽고/ 다시 햇빛에 깨어 이름을 잃고 바다에 서는 일”이라는 구절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시의 화자가 “내가 잊은 나의 이름 하나를 찾으러” “종말의 바다”에 왔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다른 아무 일도 없이 오직 일어난 일은 “뼈에 새겨진 이름을 단 한 번만 더듬”고는 다시 햇빛에 깨어 이름을 잃고 바다에 선 것뿐이다. 이는 시적 언어를 통해 삶을 구성하는 관념적 실체들을 탐지하고자 하는 시도의 반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시 더듬고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말. 이러한 반복이 시인의 운명 그 자체가 아닐까. 어쩌면 김유태의 시를 읽는 일도 그럴 것이다. 그의 시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무겁다. 그러나 그만큼 뜨겁고 에너지로 끓어넘치는 그의 시들은 때로 우리를 어둠의 심연 속으로, 하얀 극지로 안내한다. 우리는 그의 시들을 읽으며 그 안에서 일상의 표면에 드러나는 불온한 순간들을 마주칠 것이다. 정신으로서의 언어와 신체로서의 언어 사이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진 적 없는 울음들과 함께 걷고 흔들릴 것이다. 심연으로부터 온 불길한 화인들과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섬뜩하고 불가해한 눈빛들에 기꺼이 응할 것이다. 그런 일들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