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당할 수 없는 희망”
현실이 꿈이 되는 다국적 구름공장 속으로
“후폭풍의 뒤통수를 보는 눈”(이문재), 이덕규 시인의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를 문학동네포에지 46번으로 다시 펴낸다. 2003년 ‘늦깎이’ 첫 시집을 펴내며 젊은 시절의 방황과 노동, 그 피와 땀의 결실을 꺼내어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던 시편들이다. 구름으로 빚어내고 구름으로 흩어지는, 때로는 날 선 칼이고 때로는 환한 빛인 생의 언어들을 19년 만에 새 옷으로 선보인다.
심심하면 나는 칼끝을 보며 놀지
칼끝을 정면으로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 보이지 그 위에
흰 양떼가 노니는 게 보이지
(……)
모든 헛된 꿈들이
처형되는 비명 소리를, 뒤틀린 기형의
꿈들이 거세당한 얘기를 들려주지
몇몇 꿈의 조직들이
암세포처럼 칼날에 묻어나와
현실이 된 얘기를
현실이 다시 꿈이 되는 얘기를 들려주지
칼끝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마침내 천둥이 치고 석 달 열흘 비가 내리고
비로소 칼끝이 열리어
나는 칼 속으로 들어갈 거라고
심심한 나는 칼끝에 앉아
아무것도 모르고 슬픔의 샘으로
물 길러 가는 흰 양떼를 불러모아놓고
아슬아슬하게 놀고 있지 _「칼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 부분
‘날 선 칼’은 ‘뭉게구름’을 가르는 날카로움이면서 구름의 세계로 들어서는 입구이기도 하다. 칼끝처럼 아슬아슬한 시어의 놀이 속에서 ‘구름’은 갈라도 흩어도 묻어나는 독한 슬픔이며, 꿈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꿈으로 끝없이 탈바꿈하는 세계다. 젊은 날 꾸었던 달콤한 솜사탕 같던 꿈은 공사 현장에서 노동하며 “삽을 쥐고 그 적자뿐인 손익계산서를 쓸 때” “시커멓게 몰려가는 먹구름”이 된다(「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세상의 단면을 각각 한 줄씩 읽으며 흘러간 흰 구름들”은 무결한 생의 증거이지만, 이 또한 끝없이 포개지면서 “슬픈 표정의 먹장구름”이 되고 만다(「긴 수로의 끝, 늦가을물 한 자리」). 공사장의 임시 가설물인 비계를 ‘구름공장’이라 부르는 허공 답보의 이미지가 노동중 추락한 인부의 뇌 CT 결과지 위 하얀 반점과 겹쳐질 때(「구름궁전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 “현실이 된 얘기”는 “현실이 다시 꿈이 되는 얘기”로 자리를 뒤섞는다.
오랫동안 독을 삼켜왔다
조금씩 조금씩 먹어온 독에 의해
나는 길들여졌다 이제 치사량의
독성이 나를 살게 한다
아니 그 독성을 치유키 위해
날마다 더 깨끗하게 정제된 독이
필요하다 이제 내 몸속엔
독 이외의 다른 성분은 없다
나는 독이다
밤새도록 허공에 떠돌던
절망의 투명한 미세 입자들이 모이고 모여
더이상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
비로소 기척 없는
이른 새벽이 되어 지상에 내려앉는 독 _「독(毒)」 부분
「자결(自決)」로 시작하여 「독(毒)」으로 이어지는 시집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나는 독이다” 선언하며, 꿈과 불화하는 현실에 끝끝내 맞섬으로써 이를 욱여 삼켜내기로 한다. “밤새도록 허공에 떠돌던/절망의 투명한 미세 입자들이 모이고 모여/더이상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 지상으로 내려앉는 이 독의 이미지에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는 모습을 포개어본다면, 비처럼 혹은 ‘빛’처럼 삶에 날카롭게 파고드는 이 독(「빛의 원액, 그 치명적인 독」)이 ‘희망’의 다른 이름임을 짐작하게도 된다. 이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는 전원적 이미지와 꿈같은 비유 사이에서 부유하지만, 그 별세계가 곧 현실과 괴리된 환상, ‘뜬구름’의 세계로 흩어지지 않는 이유다. 구름과 단검, 혹은 꿈과 현실이라는 아이러니. 시집이 처음 출간된 지 20여 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양날은 여전히, 또다시,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 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_「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부분
■ 기획의 말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