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소개
“말들의 낮은 목소리여”
끝없이 새롭고 더없이 집요한 ‘토씨찾기’의 시작
이경림 시인의 첫 시집 『토씨찾기』를 문학동네포에지 47번으로 다시 펴낸다. “다양한 상황과 이질적인 화법”(김수이)으로 “실존적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시적 형식을 지속적으로 갱신해온”(김춘식) 시인은 그 출발부터 완전히 새로웠으며, 시작부터 부단히 스스로를 탈피해왔음을 일러주는 시편들이다. 1992년 처음 출간되었으니 30년 만에 다시 독자의 품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내 병이 완치되었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말했다 축하를 받으며 퇴원 수속을 밟고 나는 병원 문을 나섰다 거리에는 황사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실려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집집마다 아픈 사람들이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고 제 상처를 들여다보며 우는 것이 보였다 시간은 사이사이에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놓고 한 사람씩 가두곤 척척척 소리를 내며 잠그고 있었다 나무들은 눕지도 못하고 서서 앓았다 집도, 거리도, 시장도, 국회의사당도, 허위도, 진실도, 희망도 모두 아팠다 상처에서 곰팡이 같기도 하고 부스럼 같기도 한 꽃들이 살기를 뿜으며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고 무언지 더러운 뒤꿈치만 보이는 것이 어디론가 내달았다 죽을힘을 다해 그것들을 쫓아가다 스러지는 사람들이 병원에 쌓였다 의사는 어디 있을까 그가 안 보였다 완치된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고 멀리 또는 가까이 펄럭이는 검은 장막이 보였다 지친 사람들이 하나씩 다리를 절며 그 속으로 사라져갔다 수속도 없이 축하를 받으며 나는
훨씬 크고 더러운 병원에
입원을 했다
다시 병에 걸렸고
이번에도
가망은 남아 있는 것일까 _「입원인가 퇴원인가」 전문
시집 속 현실은 유배지이자 무덤이자 병동, ‘굴욕의 땅’이다. 삶 속에 병과 죽음이 상재하지만 이때의 삶과 죽음은 형이상학적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현실에 바싹 붙어 있다. 가령 병이 완치되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정신병동을 나와 마주하는 현실이야말로 “훨씬 크고 더러운 병원”이라 말할 때, 퇴원하여 ‘다시 걸린 병’이란 비유나 수사가 아닌 실재하는 고통이자 폭력이어서, 시인은 앓음으로 울음으로 이 삶에 부딪치려 한다. “이를 뽑고 몸살을 앓고 진통제를 먹고 싸움을 하고 은행에 가고 증권회사의 전광판이 한없이 허방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보고 시장 좌판 위의 나물단이 자꾸 움츠러드는 것을 보고 지하상가 가게들이 파리 날리는 것을 보”는 일주일(「그 한 주일 동안 나는」), 혹은 그 모든 일상이 삶이라는 병동, 유배지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끝 모를 재앙과도 같은 현실에 맞서는 시인의 방식은 투항이 아닌 스스로 더 큰 재앙이 되는 일이다. 질주하는 차 속 겁 없는 총알이 되어(「총알택시를 타고」), 미시시피 상류로 향하는 ‘태풍 순이’가 되어(「태풍」).
나는 지금 총알이다
질주하는 차 속에서 나는 겁 없는 총알이 되었다
(……)
누군가가 쏜 총의 총알이 되어 날아가고 있는 시대, 사람들 너무 빨라 오히려 고요한 그것들의 보이지 않는 속도감 차창으로 처녀막을 찢기는 시간들의 아득한 비명소리
미사일이 되고 싶다 나는
머리만 맞고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그 아랫도리를 쏘고 싶다
왼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비닐하우스의 막처럼 투명하게 끝이 없이 쳐진
저 음흉한 시간의 끝을 향해 멋지게 명중하고 싶다
타……………………ㅇ _「총알택시를 타고」 부분
‘토씨’가 말과 말 사이에 분명히, 그러나 숨은 듯 놓여 말과 말을 잇고 말에서 말을 이끄는 조각들이라면, 시인에게 이 토씨는 곧 시의 씨앗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현실에 떨어진 이 토씨들을 좇아, 잃어버린 가장 사랑하는 토씨를 찾아 헤맨다. 다양한 화술로, 늘 새로운 목소리로 외치지만 결코 에두르는 법 없는 울음이다. 그 어느 쪽에 속할 생각 없이, 그 어떤 분류에 편승할 마음 없이, 가장 가깝고 가장 절실한 언어로 현실을 그려내는 일. 요설과 욕설을 피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도리어 기꺼이 뛰어드는 일. 말을 잇고 시를 빚는 시인의 간곡한 ‘토씨찾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날도사람들은무슨무슨이름의깃발들을손에손에들고왁자하니떠들며어디론가가고있었는데그들이한걸음씩옮겨놓을때마다온갖모양의앙증맞은토씨들이데구르르바닥에떨어져서는다리를절름거리며어디론가떠나가고있었습니다나는그들이버리고간토씨들을따라다니며욕심껏주머니에주워담았습니다하늘이노래질때까지그짓을하다보니“아”욕심때문에왼쪽손을잡고따라오던내가가장사랑하는토씨하나를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울며 떠났을
내 토씨를 찾아
노란 하늘 속으로
떠났습니다 _「토씨찾기」 전문
■ 기획의 말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