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음악에 대한 나의 소견이다.
나는 이것을 음악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이 산문인지 시인지 혹은 소설인지는
당신이 판단할 일이다.”
시인 조연호의 첫 산문집,
혹은 음악에 관한 어떤 산문시
조연호라는 이름.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6권의 시집을 펴냈고, 그 여섯번째에 스스로 『유고(遺稿)』(문학동네, 2020)라 이름 붙인 시인. 김행숙 시인의 호명을 빌려오자면, 그는 ‘미지의 X’로 향하는 자이면서 미지의 X를 발견하는 자, 그리하여 기어이 스스로 미지의 X가 된 시인이기도 하다. 이토록 밀도 높게 희미한, 가장 난해하면서 가장 투명한, 이 모든 모순 형용을 고스란히 언어로 이룩하는 시인.
난다에서 다시 엮은 『행복한 난청』은 2007년 출간되었던 그의 첫번째 산문집을 개정증보한 것이다. 15년이 흘렀으나 여전히 새로이 읽히는 글임은 시인 조연호가 앞선 것이 시대가 아니라 시라는 장르 자체인 까닭이다. 시를 넘어 시를 벗어나 마침내 시를 이루는 글편들, 그 머리에 달아둔 ‘음악에 관한 어떤 산문시’라는 부제가 끝내 부연일 수밖에 없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이 책이 시인지 산문인지 소설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은 “이것은 음악에 대한 나의 소견”일 뿐이라 무심히 말하는 시인에 이르러 반드시 실패할 것이므로.
그 섬의 많은 사람은 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묻혔다. 나무와 숲은 그들과 함께 영생한다. 그때 나무는 죽은 자의 영혼을 이어가는 영생목(永生木)이 된다. 망자들이 산 자들과 열매를 나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스쳐간 모든 것이 나로부터 멀어지기를, 정확하게 나를 외면하기를 기다린다. 속도는 시간의 형체일 수 있다. 시간이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밤과 낮의 습관일 뿐, 새들은 하루를 날아갔지만 늘 입구에 서 있었다. 기다렸다. 허탈을 몰랐다. 지루한 장마였고 멋진 번개였다. _85~86쪽
무형 속의 유형, 유형 속의 무형
『행복한 난청』은 분명 음악에 관한 글들이지만 이를 쓴 시인 조연호를 두고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평한다면 다소 부족해 보인다. ‘언어로 음악을 짓는다’고 말해도 미진함이 있다. 조연호의 시뿐만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음악’이라 말한다면 간신히 근처에 이를 수 있겠다. 그의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의 제목이 마우로 펠로시(Mauro Pelosi)의 곡명에서 따왔음을 떠올리게도 된다. 그렇다면 이 책 또한 ‘음악에 대한 소견’을 넘어 ‘그 자체로 음악’이라 말해보면 어떨까.
한 편의 글마다 하나의 음악 앨범을 소개하고 있으나 그 뮤지션의 이름들은 적잖이 생경하다. 독일 밴드 횔덜린(Hölderlin)부터 인도의 민속음악가 키쇼리 아몬카르(Kishori Amonkar), 국명마저 낯선 러시아 연방 투바공화국의 훙후르투(Huun-Huur-Tu), 카리브제도 바하마의 엑수머(Exuma)에 이르기까지,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는 전 세계 곳곳의 음악을 아우르지만 이 지형도의 본질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다. 그의 글을 따라 종으로 횡으로 교차하다보면 우리는 단순히 다양한 음악을 알게 되는 대신 ‘음악’의 심층에 도착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행복한 난청』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어떤 앨범, 하나의 곡(piece)이 아닌 음악의 본령 그 자체다.
요컨대 『행복한 난청』은 우리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대신 음악으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음악 바깥을 서성이는 듯한 조연호의 문장, 그 파편들을 따라가는 길은 나선이고 이 책의 중심이 곧 미로의 한가운데다. 음악에 대한 여정이되 멜로디도 리듬도 아닌 무언가, 음표와 쉼표를 동시에 지워내는 무언가, 다만 소나기처럼 우리를 적시는 그것은 결코 ‘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다. 마침내 우리는 음가 없는 음악에 흠뻑 젖어 나올 것이며, 끝내 그 ‘곡’에 대해선 무엇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조연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우리는 무엇도 듣지 않으면서 음악을 경험한다. 책의 제목에 ‘난청’과 ‘행복’이 나란한 이유일 테다.
인디 록밴드 뉴트럴 밀크 호텔을 이끌며 곡을 쓰는 것을 제외하면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며 음악을 채록(field recording)하는 것만이 취미인 그리스인 제프 맹검에 대해, 이것이 자기의 이름을 달고 발표 할 수 있는 음반인지에 대해, 나는 반문하지 않기로 한다. 패러디의 미학도 미학이고 키치의 미학도 미학일진데 어찌 채록에 미학이 없겠는가. 단지 바라보는 것, 현실세계를 투영하는 앵글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미학이 만들어지는 것을 익히 보아왔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연주에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크레디트에 늘 이 앨범이 오르내리는 걸 보면 채록하는 자의 심미안 자체를 음악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정서에 나는 뜬금없이 감동받곤 한다. _14쪽
내가 다시 태어났을 때 듣고 싶은 음악,
난청 그리고 환청
이번 개정판을 펴내며 「배농排膿」이라는 이름의 한 꼭지를 더했다. 그의 시집 『농경시』(문예중앙, 2010)와 이어지고 얽히되 이 책의 말미에서 전혀 새로운 조성(調性)으로 울리는 글이다. 시이면서 동시에 산문인 글, 산문으로서 시에 이르는 글이기도 하다. 장르에서 벗어나 장르로부터 가장 자유롭기에 장르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시인 조연호의 힘인 까닭이다. 『행복한 난청』에서 그 경계를 지우는 무한한 교차를 발견한다면 차학경의 『딕테』를 떠올릴 것이고, 음악에 관한 글이 스스로 음악이 되는 곡절을 따라간다면 파스칼 키냐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닮음이라는 구획에서조차 놓여나 또 저만치 멀리서 앞서 걷고 있는 시인 조연호의 뒷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미래의 글쓰기가 시인의 걸음이라 한다면 쥘 수 없고 붙들 수 없는, 기어이 들을 수 없는 이 난청, 끝내 볼 수 없는 난시야말로 우리가 시인 조연호의 뒤를 따르는 방식이겠다.
이로써 난다에서 이전에 펴낸 바 있는 조연호의 두번째 산문집 『악기(惡記)』(2017)의 곁에 첫번째 산문집 『행복한 난청』을 놓게 되었다. 두 책 모두 이연미 작가의 작품으로 표지를 이었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두 산문집이 5년이 흘러 나란히 놓이는 셈이다. 변주이자 화성(和聲)이라 말해도 좋겠다. 어쩌면 시인은 다카포(da capo, 처음부터)라 이를 것이다.
드럼을 치던 녀석들도, 노래를 부르는 녀석들도, 베이스를 치던 녀석들도 많았지만 이제 뭔가 음악 이외의 것을 하며 살아가고 모두를 용서해도 자기 자신만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코뿔소의 뿔처럼 딱딱한 각질의 손끝들을 만져보고 단순한 말이 왜 타인을 납득시키기엔 독약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걸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걸 ‘다카포’라고 부른다. 코 위에 돋거나 손끝에 돋거나 그건 아무리 봐도 서로 다르지 않았고, 처음부터 너무 많이 부서진 채 뿔들을 주고받았으니까. 도돌이표가 있었지만 거기엔 돌아가야 할 곳이 없었다. _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