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달리다가 마지막엔 발뒤꿈치에 날개가 돋아 공중으로 도약하는 우리!”
인간을 사로잡는 권태와 우울의 끝에서
사랑과 자유로의 도약을 감행하는 발돋움
문학동네시인선 208번으로 장석주 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을 펴낸다. 시와 철학을 양손에 쥐고 수십 년간 인간을 탐색해온 시인이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시집이다. 인간 정신 활동의 극지까지 다다라본 시인은 현대인의 내면에 뿌리박힌 권태와 우울을 들여다본다. 그 스스로가 이미 권태와 우울의 “희생자이자 수혜자”(류신, 해설에서)일 만큼, 깊이 가라앉아본 이만이 누릴 수 있는 미美와 고요가 독자의 공감대를 건드린다. 삶이 지루하다 여기는 이는 자신의 눈을 끌어당길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시인은 현대인이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삶의 기쁨을 순정히 찬미할 줄 아는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을 꿰뚫어본다. 그리고 그 기쁨은 멀리 있지 않다는 진리도. 무채색의 풍경을 관조하던 화자들의 눈에 점차 “날쌤으로 경쾌함을 짓는”(「삼나무」) 고양이와, 사랑하는 이가 “중력의 그물을 찢고 공중에서 새의 자세로 날아오르는”(「발레 1」) 몸짓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인간 본래의 권태와 우울이 장석주를 거쳐 사랑과 자유로의 발돋움으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봄이 오면 잘 살아봐야겠다. 우리는 기린을 보러 동물원에 간 적이 없지. 봄이 오면 당신은 초록 화관을 쓰고 거리를 걷겠지. 잘 웃는 당신, 당신은 겸손하고 시금치를 좋아한다. 시금치를 먹을 때 소량의 철분이 당신의 핏속으로 녹아든다. 하루 치의 고독이 녹아서 스며들 때 당신은 밤의 별채 같은 고독을 끌어안으며 웃는다.
_「밤의 별채 같은 고독」에서
장석주의 화자들은 권태와 우울에 젖어들어 있다. “인생에서 가장 미약한 불행의 신호”(「엄마, 왜 이렇게 작아지셨어요?」)인 그 감정들은 “우리의 양식”(「생각」) 그 자체다. 그러나 시인은 그 기저에 자리한 슬픔을 발견한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강을 가로지르는 교각이 거짓말처럼 내려앉는 사고를 겪고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깃발을 치켜든 용기가 아니라 불운을 웃도는 행운 탓이다.”(「삼나무」) 이제껏 자신이 단지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자각과, 수많은 죽음을 속절없이 감내해야 했던 시절이 인간을 조로早老하게 했다. 분명 “슬픔 한 점 없이 살았다면 파렴치한”(「게르와 급류」)이겠으나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슬픔을 슬픔으로 받는 부족”(「강과 나무와 별이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권태가 지루함이나 게으름, 따분함이나 무료함과는 차별되는 현상이라면, 권태가 비록 무익할지는 몰라도 무의미하지 않은 감정이라면, 장석주는 권태주의자다. (…) 멜랑콜리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아득한 괴리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면, 장석주는 멜랑콜리커이다. (…) 다른 누구보다도 세계와 인간의 삶을 깊이 통찰하는 시인은 자신이 늘 폐허나 다름없는 우울한 세계에 내던져진 현존재임을 예민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늘 시인의 수심(愁心)은 깊다.
_해설에서
그러므로 권태와 우울은 깊은 슬픔에 젖은 인간이 뒤집어쓰는 방어구다. “당신의 슬픔이 깊으니 내 눈썹은 검고 내면은 단단하다.”(「하얀 방」)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높은 벽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장석주는 인간의 시야 바깥에서 일어나는 해방의 조짐을 느낀다. “지금 몇억 광년 떨어진 자리에서 어떤 우주의 눈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까요.”(「생각」) 그 무궁무진한 경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는 “이번 생에서는 무지를 더 키우고자 한다.”(「여름의 끝 2」)
혼돈 속에서 생각의 지평선은 더 넓어집니다. 자는 데 여러 베개가 필요 없다는 생각, 인생 별거 아니라는 생각, 눈발 붐비듯 머릿속엔 생각이 붐벼요. (…) 우리는 생각의 금수로 살다 죽겠지요, 이제 생각 대신에 춤을 춰요. 고양이로 환생한 구루들, (…) 걷고 달리다가 마지막엔 발뒤꿈치에 날개가 돋아 공중으로 도약하는 우리!
_「생각」에서
장석주에게 무지는 곧 무아지경의 가능성으로, “침울”과 “불행”(「발레 2」)의 자리를 “춤 너머의 춤”이 대신하기 시작한다. “공중의 한 정점에서 황옥인 듯 반짝”이는 ‘당신’의 궤적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언어들은 『꿈속에서 우는 사람』의 가장 찬란한 정점이다. 이제 춤은 “저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다짐하는 낙인”(「발레 1」)이면서도 자유 그 자체가 된다. “저기 높은 데서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하는 동물의 품격”(「세계의 침묵을 경청할 때」)을 지닌 고양이처럼, 시집 속에서 지면을 박차고 오르는 무수한 움직임들은 인간을 옭아매는 권태와 우울의 중력으로부터 자유와 사랑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다.
자, 때가 왔다! 저 높은 데서 나뭇잎과 빗방울을 따 내리듯이. 갈비뼈를 모은 뒤 발뒤꿈치를 들고 걷자. 가난한 연애에 마음을 굽히지 말자. 척추를 곧추세우고 무릎을 올려 나는 법을 배우자. 바람과 속도의 노래를 부르자. 두 팔을 뻗어 공중으로 솟구치는 새가 되자. 상(床) 위에 차가운 물 한 잔을 올리자. 이 별의 연인을 위해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자. 계절이 끝나기 전에 머리를 숙여 안녕, 인사를 하자. 당신의 날개와 고통을 훔치는 새가 되자.
_「발레 2」에서
순하고 정한 것에 대한 애호를 감추지 않는 장석주의 시야말로 슬픔이 지나간 뒤 곧게 남은 사랑이리라. 이제 화자들은 “작은 사랑”(「꿈속에서 우는 사람」)과 함께 밤산책에 나선다. ‘걷기’는 “당신이 당신 밖에서 자유를 얻는 몸짓. (…) 오, 경이로운 슬픔 속에서 슬픔 밖으로 나가는 일”(「밤에 식물처럼 자라는 당신과 걷기」)이므로. 그러면서도 그들은 걷기로 자족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발돋움을 반복한다. 청유형으로 가득한 이 시집은 “우리에겐 솔직한 화법이 필요해!/ 더 많은 연애와 자유가 필요해!”(「동물원 초」) 외치며 슬픔을 마치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처럼 화자들과 함께 북돋움의 언어를 횡단하며 시집의 끝에 다다른 이는 이제껏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온’ 자신이 비로소 기쁨을 실감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말리라. “기쁨을 기쁨으로 받을 때 물은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가리라.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르는 먼 곳에서 모란꽃이 필 무렵엔 우리 사랑도 시들지 않으리라”(「강과 나무와 별이 있는 풍경」).
■ 장석주 시인과의 5문 5답
1. 5년 만에 새 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으로 독자분들을 만나는 소감이 궁금합니다.
5년이란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났다고 느꼈고요. 『꿈속에서 우는 사람』이 열여덟번째 시집인데요. 교정을 보는 내내 시를 50여 년이나 썼는데 수준이 이 정도구나, 하는 자괴감으로 시집 출간을 작파해버릴까, 라는 극단적 생각을 했어요. 그만큼 출간 과정이 힘들었어요. 교정, 교열을 네 번씩이나 본 것도 처음이고요. 시집을 읽고 나서,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안도감과 또 한번 해냈다는 기쁨도 벅차올랐지요. 제가 할 것은 다 했다, 라고 생각해요. 이제 시집은 제 손을 떠나서 독자의 것이 되겠지요.
2. 시집의 제목이 원래는 ‘꿈속에서 우는 사람’이 아니었죠. 지금의 제목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꿈속에서 우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진작부터 시집 제목은 ‘두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앞선 문학동네시인선 중에 ‘두부’가 들어간 시집이 나왔어요. 중복되는 느낌이 드니까, 그건 피하자 생각하는 중에 ‘모란꽃 피는 일과 소년들의 선행’을 생각했고요. 최종적으로 ‘꿈속에서 우는 사람’이 떠올랐어요. 삶이란 게 아득한 한낮의 꿈이고, 반대로 꿈은 한바탕의 몽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그게 시집의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고 느꼈지요. 이번 시집의 시들은 주로 파주에 살면서 쓴 것들인데, 몸으로 거친 시간의 저 밑바닥에 흐르는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를 마주보고 그것을 시의 동력으로 삼았어요. 의도한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지요.
3. 시편들을 읽으며 사랑과 자유를 향하는 청유형의 문장들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권태와 우울로부터 도무지 헤어날 길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소중함을 느끼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게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에 더해 특별히 지키고 있는 루틴이나 지침 같은 것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모란과 작약 같은 꽃이나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든 고양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슬퍼지곤 해요. 생명 가진 것들을 향한 연민 때문이겠지요. 독자들이 제 시를 읽을 때 나른한 권태와 우울한 기조에서도 사랑이나 아름다운 것들이 주어질 때 벅차오르는 생명의 환희 같은 걸 붙잡으시길 바라요. 제 삶의 루틴이라면 날마다 사과 한 알을 먹고, 카페에 나가 책을 한 권씩 읽고, 한 시간씩 산책을 하며, 무언가를 조금씩 쓰는 것이지요. 날마다 짧게 메모한 것들은 시가 되기도 하고 산문이 되기도 하지요.
4. 시집을 다시 돌아보면서, 특히 마음에 남는 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역시 표제작인 「꿈속에서 우는 사람」이 가장 마음에 남고요. 그 밖에 「멜랑콜리」 「노스탤지어」 「버드나무 갱년기」 「이별의 노래」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던 시절」 같은 시가 떠오릅니다.
5. 독자 여러분께 인사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울고 싶은 당신, 울 때 조금 덜 울고
웃고 싶은 당신, 웃을 때 더 크게 웃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