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학평론가의 첫 평론집
서영채의 첫 평론집 『소설의 운명』이 출간되었다. 정밀하고 날카로운 책읽기와 논리학과 수사학이 잘 조화된 글쓰기로 정평 이 나 있는 젊은 비평가 서영채의 평론집 『소설의 운명』은 90년대 문학 현장에서 야심적인 역사철학적 모험을 감행하며 비평 의 위력과 매력을 그야말로 한껏 과시하고 있다.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1990년 시집 『태풍』을 출간한 바 있는 문학평론가 서영 채는 1992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장미의 이름 읽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는 강원대와 서 울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계간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첫 평론집 『소설의 운명』을 통해 우리는, 소설과 문학 나아가 문화 일반의 깊숙한 영역들을 횡단하면서 독특한 비평적 감수성과 명징한 분석 능력을 보여주는 한 신예 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한 모색과 새로운 방향 찾기
평론집 『소설의 운명』은 성격에 따라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부분은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깔려 있는 문학과 문화에 대한 일반론이고, 두번째 부분은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읽기’,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 읽기’ 등 예리 한 시각으로 분석한 작품론이다. 그리고 세번째 부분은 황지우, 박노해의 시로부터 신경숙, 윤대녕의 소설까지 해당 분기의 문학 적 상황에 대한 개괄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글들이며, 네번째 부분은 이문열, 이태준, 양귀자 그리고 장정일 등 네 명의 유명작가 들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전복적인 작가론이다.
책 제목 『소설의 운명』은 작가 김남천이 1940년에 쓴 비평의 제목을 빌려온 것이지만, 그 말에서 풍겨져오는 어떤 비극적이 고 숙명적인 느낌이나 사위어가는 황혼의 냄새를 뛰어넘는, 』90년대 문학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새로운 방향 찾기라는 의미망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길찾기
서영채의 비평공간을 관류하고 있는 주요한 하나의 문제의식은 근대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한 해방 자로서의 근대, 인간을 생존경쟁의 난투극 속으로 몰아넣는 난폭한 파괴자로서의 근대, 이 근대의 이중성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문화산업과 상품미학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로 만들었으며 문학을 『접대부의 삶』과 『수녀의 삶』이라는 양극단의 위험 앞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 근대는 거인이자 괴물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창가와 수도원의 매력 사이, 그 위험한 양극단에 놓여 있는 우리 시대의 소설과 문학이라는 운명의 역설 앞에서 그의 비평적 글쓰기는 『소설의 행로를 모색하는 일』 즉 『소설의 길찾 기』에 다름아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이념의 진공상태에 빠져 있는 』90년대는, 그러므로 길찾기의 어려움이 극악한 형태로 표출되는 시 대인 바 부정의 대상인 어둠과 적이 부재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둠과 적의 부재는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의 길찾기가 불가능하 다는 것을 의미한다. 』90년대 장편소설의 세 가지 형식을 환멸, 환상, 모험으로 분석하면서 서영채는 그러한 형식이 보편적인 근 대성이 마련해놓은 필연적인 『허무주의』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상품미학의 경쾌하고 화려한 허무 주의와 우울한 문화염세주의로부터 소설 자신을 격리시키기 위해서, 즉 소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쓸 쓸하지만 무겁고 힘있게 서영채는 말한다.
“문학과 예술은 바로 그 상품미학의 허무주의에 맞서기 위한, 그 자본제적 허무주의의 이면 속에서 우리가 끝내 팔아서는 안 될 그 무엇을 탐색하기 위한 정신의 거점”이며, “상품미학의 지배는 필연적이되 그 필연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 필연적이며 지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세적’으로 저항하는 일, 또 그 안으로 잠입하여 폭파를 기도하는 일, 그것이야말 로 우리 시대의 문화논리가 추구해야 할 최선의 지향점”이 아닌가 하고.
문학의 운명에 대해 자명성의 강을 건너는 평론집
서영채의 첫 평론집 『소설의 운명』은 불안하고 위태한 우리 문학의 운명에 대해 자명성의 강을 건너고자 하는 젊은 평론가의 의욕적인 작품이며, 문학의 운명과 비평의 심연을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화사한 작품이다. 그 자신 스스로 명명한 『고약한 존재 론의 시대』인 1990년대에 서영채는 첫 평론집 『소설의 운명』을 한 손에 들고 우리는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가, 우 리 문학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길은 무엇인가를 고통스럽게 혹은 처절하게 묻고 있다. 동세대 비평가인 이광호는 이 평론집을 다 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근대비평은 오랫동안 계몽의 입으로 살아왔다. 언제나 규범과 과학이 중요했고 언어의 결을 문제삼으려는 노력조차도 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서영채의 비평은 이러한 한국근대비평사의 주류에 대한 하나의 전복이다. 그 전복은 두 가지 맥락을 포함 한다. 그 하나는 근대적 정신과 형식의 형성에 관한 내재적 이해 위에서 그것의 부정성을 사고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문화적 현실이라는 보다 폭넓은 분석 단위 안에서 예술과 문학의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서영채는 그 적극적인 의미에서 계몽에 대한 계몽을 실천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 비평의 가장 의미있는 가능성이다. 어쩌면 서영채를 통해 우리 비평사는 오래 유예되어왔던 계몽의 자기갱신을 이루어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