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공중전화부스에 사내가 들어 있다 꾹꾹 눌러낸 다이얼은 서른 번을 넘긴다 타국으로 젖어드는 신호음 저편 그리움이라는 색깔로 반응하는 목소리, 부스 안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 사내의 머리와 어깨 실루엣이 공중전화부스 불빛에 흠뻑 젖는다 아득히 먼 곳에서도 색이 뚜렷하다 ―「리트머스」 중에서
“실뿌리처럼 금이” 간 채 “미로같이 얽혀”(「산동네의 밤」) 있는 곳, “울음이 엉겨 잘 돌아가지 않는”(「대학병원 지하주차장」) 것, “틈만 나면 살고 싶었”(「홀씨의 나날」)던 나날들 등, 그의 시는 타인을 적나라한 현실 속으로 인도하며 그 진실한 풍경을 편견 없이 비춰내려 노력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과 태도는 비정하고 삭막한 현실세계의 치부를 그려낸, 시집의 핵을 이루는 몇몇 시편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외국인 노동자로 짐작되는 한 사내가 전화선을 통해 타국으로 실어보내는 고독과 그리움을 그려낸 이 시에서 사내가 들어 있는 공중전화부스는 리트머스 시험지에 비유된다. 그리고 전혀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 않은 이 그림은 곧 “안개에 젖고 밤바람에 흔들려 후둑, / 스포이드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나뭇잎 / 가을은 그렇게 한 가지 색으로 반응해 물들어간다”는 서정성으로 승화한다. 그들은 각각의 사물로서 고유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다른 개체로 쉴새없이 번져나가는데, 여기에 시인 특유의 감수성이 가미되면서 그 풍경들은 한층 인간적인 시각을 지닌 것으로 변화한다. 이렇듯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건조하거나 질척거리지도 않는 시인의 시선은 시집 후반부로 가면서 이윽고 자아의 정체성과 실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어디에도 있는 나를/어디에도 없게 하는 로그아웃”(「로그인」), “녹화 테이프가 수없이 되돌려 재생되고 있는 / CCTV 안, 나는 아직 살아 있다”(「지하에서의 실종」), “나를 나로 젖게 만드는 의식은 옷감처럼 / 가로세로의 촘촘한 배열에서 번져온다 / 나는 가상현실처럼 시뮬레이션된다”(「시간의 이면 1」) 등, 디지털과 온라인으로 나타나는 가상현실 속에서 시인의 ‘나’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성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 모든 방황이 귀결되는 것은 “나는 살아 있다”라는 한마디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현실의 수많은 균열과 그 균열 속에 존재 / 부재하는 ‘나’들을 일시에 무력화시키며 또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게” 해준다. 시인이 꿈꾸는 세계와 삶은 이제 막 첫 마침표를 찍었을 따름이다. “잘 빚어진 시에 대한 고전적인 예술 지향과 언어에 대한 외경심을 깊이 간직한, 최근 시단의 비주류(?)의 영토를 진중히 답파하는 젊은 시인”이라는 평을 받는 그의 첫 발짝은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존재의 뿌리이면서 마찰과 마찰 끝에 오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미래
윤성택의 언어는 천평저울에서 내려온다. 미세한 눈금을 읽고 내려오는 그의 언어는 세계의 사각지대를 찾아가 예리하게 꽂힌다. 그는 트릭을 쓰지 않는다. 오늘의 불확실한 매트릭스의 세계가 보여주는 모든 징후를 그는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초감각적이라고 할 만한 그의 언어는 항상 안테나처럼 예민하게 대상을 포착하며 그에 따른 적확한 해석과 진단은 풍경의 이면에 숨어 빛을 발한다. 시원스런 몇 차례의 덤블링과 고공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일회전, 이회전, 삼회전을 보여준 뒤 가볍게 착지하는 십점 만점의 체조선수처럼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완벽한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_강인한(시인) 빛이 열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 마찰에 그 몸을 기대어야 한다. 그 정신은 어느 것도 쉽게 관통하지 못한다. 머물면서 지나가고 지나가면서 끊임없이 보풀을 일으킨다. 옷깃만 스쳐도 생기는 이 상처가 보풀의 다른 이름이라면, 그 이름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서 은근히 열을 뿜는 문장이 또한 시를 만들어간다. 젊은 시인 윤성택이 기대는 문장도 이 언저리를 맴돌며, 휘돌아가며 뜨끈한 불빛 하나를 만들었다. 불빛의 가장 먼 유래가 별에 담긴 우리의 눈빛에 있듯 돌고 돌아서 도착하는 시인의 내면은 그래서 온통 밤하늘을 닮는다. 환하고 어둡다. 고통스럽고 잔잔하다. 산동네의 밤하늘도 알전구 켜진 어느 구석방의 희미한 온기도 기어이 틈을 비집고 나와 말을 거는 것이다. 돌에도 실핏줄이 있다면 물빛 그렁그렁한 그 눈에도 사소한 균열이 퍼져 들어간다. 그것은 존재의 뿌리이면서 마찰과 마찰 끝에 오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미래다. “죽음까지 관통하는 미래”에 내맡긴 이 시인의 행보에 잔잔한 박수를 덧보탠다. _김언(시인)
* 2006년 11월 3일 발행
* ISBN 89-546-0233-9 02810
* 121*186 | 136쪽 | 7,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양수현(031-955-8865, 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