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현대문학』에 「더티 와이프」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삼 년 만에 펴내는 첫 소설집 『이로니, 이디시』에는 명쾌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여덟 편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등으로 채워진 작가의 이력처럼 소설 역시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굵직한 주제와 맞물려 돌아가는 문장의 행간에선 소설 속 인물들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실패임을 알고도 하는 무모한 게임
명지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반듯하지 않다. 자신의 남자친구와 바람피운 후배에게 복수하기 위해 ‘껌 좀 씹는다는’여고생들을 찾아가 머리끄덩이 잡는 방법을 배우고(「목표는 머리끄덩이」), 뿜어내는 빛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눈에 들어간 벌레를 꺼내지 않는다(「충천(蟲天)」). 옆구리가 붙어서 태어나기도 하고(「이로니, 이디시」), 어느 날 갑자기 목에서 아가미가 돋아나기도 한다(「손톱 및 여린 지느러미」). 이들은 모두들 나름대로의 삶을 위해 노력하지만 어딘지 부족하고 조금씩 모자란 우리들과 닮아 있다.
아씨들의 성격은 참으로 딴판이다. 둘은 평소, 한 입에서 나오는 한 목소리 같다가도 툭탁툭탁 말싸움을 할 때면 보색처럼 판이하다. 큰아씨는 즐거운 재담꾼이지만 가끔은 지나치다. 작은아씨는 대접에 담긴 물처럼 고요하다가도 이치를 가려 따지기 시작하면 당해낼 사람이 없다. 때로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솟구치는 감정이 폭발해 “너를 뜯어내고 싶어”라고 울부짖을 때면 둘 다 몹시 가엾다. 그렇게 지독한 소리를 내뱉는 순간에도 둘의 몸은 옷 한 벌 안에 한데 들어가 있다.
―「이로니, 이디시」중에서
그러나 그들은 결코 무겁게만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익살스럽고 능청맞아서 때로는 경쾌하기까지 하다. 도예가 선생은 장님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빛을 내는 벌레들의 군무를 찾아 돌아다니다 결국엔 그 광경을 보는 데 성공하고(「충천(蟲天)」), 옆구리가 붙은 자매는 감당되지 않는 자신들의 몸뚱이와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도 이야기를 지어내며 분한을 풀어낸다(「이로니, 이디시」).
수천 개의 크리스털, 수천 개의 찬란한 빛이 눈앞에 가득했다. 눈이 부셔 시력을 잃을 것만 같았다. 머리 위를 맴돌던 빛은 점차 하나로 모여들었다. 벌레가 많아질수록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성냥불을 끄고 난 다음처럼 매캐한 단내가 사방으로 퍼졌다. 벌레들은 대열을 따라 뱅글뱅글 돌며 조금씩 위로 올랐다. 선생의 얼굴이 불이 켜진 듯 환했다.
―「충천(蟲天)」중에서
이렇듯 『이로니, 이디시』의 인물들은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기이하고 징그러운 벌레가 그려진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 선생이 공방이 망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예술세계를 개척해나가듯, 명지현의 문장도 결국 패배로 끝나고 말 글쓰기의 어려움을 삶에 대한 총체적인 살풀이로서 극복한다. 이 “징그러운 그릇”은 작가가 내놓은 나름의 해답이며, 삶에 관한 하나의 훌륭한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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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머리끄덩이」 남자친구와 바람난 후배를 혼내줄 생각에 ‘나’는 ‘껌 좀 씹는다’는 여고생들을 찾아가 기선을 제압할 방법을 배운다. 유리 씹기, 담뱃불 혀로 끄기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듣지만 그녀에게 가장 와 닿는 건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드는 것이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자 ‘나’는 눈가에 시커먼 화장을 하고 거리로 나선다. 그녀는 후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어 혼내주고 싶었지만, 정작 후배는 나오지 않고 남자친구만 나온다. 그에게 헤어짐을 통보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그녀를 대한다. 그 절정의 순간, 그녀의 화끈한 복수가 시작된다.
「이로니, 이디시」 고만이는 독일인 양부모를 두고 있는 쌍둥이 이로니와 이디시의 하녀이다. 이로니와 이디시는 옆구리가 들러붙은 샴쌍둥이. 기독교 신자 교동사모님의 보살핌 아래 생활하고 있는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불안정한 시국에서도 항상 발랄하고 꿋꿋하다.
다혈질에 생각 없어 보이지만 그만큼 쾌활한 이로니와 묵직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디시는 항상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기록하는 일에 열심이다. 고만이도 그런 그들을 의지하며 점차 어린 삶을 키워나간다. 양부모와 친한 일본인들이 보내준 목이 두 개인 히나인형처럼 떼어낼 수 없는 그들. 거인 김부귀처럼 그들은 보통의 삶을 살 수 없다. 서로에게 상처받고, 그만큼 보듬으며 삶을 이어나가던 중, 결국 고만이마저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속에 든 맛」 ‘나’는 뛰어난 맛으로 유명한 식재료도매상에서 일하고 있다. 사장은 귀신같은 솜씨로 유명했지만 정작 식당을 개업하면 망하기를 반복했다. 음식이란 팔아먹을 요량으로 만들면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에게 육수를 공급받는 냉면집 아저씨와 낯선 남자 하나가 찾아온다. 남자는 사장에게 인육을 이용한 요리를 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를 수락한 사장은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인육을 이용한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내려 하지만, 인육요리를 연구하는 동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쇠약해져간다.
「충천」 도예가인 ‘선생’의 눈에 벌레가 들어가버렸다. 충천(蟲天)이라 불리는 벌레인데,
선생은 반딧불이보다 작지만 더욱 황홀한 빛을 내는 이 벌레에 빠져 있다. 눈알 사이에서 자꾸만 자라나는 벌레 때문에 선생이 시력을 잃을까봐 ‘나’는 걱정하지만, 그는 도무지 벌레를 억지로 끄집어내려 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벌레집만 찾아다니며 공방을 비우는 일이 많다보니 스승이 버린 공방을 지키던 제자들도 하나둘씩 떠난다. 나 혼자 남아 그를 지키며 공방을 꾸려나가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충천의 비상을 보는 일에만 집중한다. 결국 선생과 나는 충천의 눈부신 비상을 목격하게 된다.
「표준사이즈」 삼촌의 소개로 작은 양복점에서 일하게 된 ‘나’는 실수투성이다. 엉터리 바늘땀을 몰래 잘라버리고 다시 재봉틀 바퀴를 돌려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중년임에도 반듯한 외모에 항상 말쑥한 정장을 입고 다니는 사장과 그를 은근히 동경하는 스물몇 살 여자애인 나. 그러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삼촌과 사장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그건 바로 그들이 애인관계라는 사실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동성(同性)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 삼촌은 그 사실을 눈치챈 가족들 앞에서 영 체면이 서질 않는다.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장과, 점점 그를 피하려는 삼촌.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나.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손톱 밑 여린 지느러미」 ‘그’의 목덜미에 아가미가 돋아나고 있다. 언뜻 보면 단순히 크게 덴 자국 같지만, 초승달처럼 길게 빗긴, 그 틈으로 손가락을 넣으면 야들야들한 주름이 만져지는 분명한 아가미이다. 게다가 자꾸만 생선 통조림이 당긴다. 의사는 그가 서서히 물고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안 앞바다에서 사라진 그의 아버지처럼. 어머니의 말대로 수영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큰일이다. 바다는 점점 더 그를 유혹하고, 어느덧 손톱 밑에서 여린 지느러미까지 자라난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물고기가 될 것인가.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더티 와이프」 ‘경복이 형’에게 다단계 사기를 당한 ‘나’는 공장지대의 빈 지하실에서 ‘리얼돌’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그 실리콘 인형을 ‘아이’라고 부르며 마치 사람처럼 대한다. 그러나 리얼돌은 단지 남자들의 성욕을 풀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일 뿐이다. ‘아이’에게 함부로 굴며 다단계 사기를 당해 돈 대신 남은 물건들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던 ‘나’는 늘어가는 빚에 점점 힘겨워하고, 결국 ‘아이’를 팔 결심을 하게 된다.
「너의 콩조각」 ‘나’는 항상 청치마와 노란셔츠를 입고 복사집 아저씨를 만나러 간다. 나의 남자친구였던 성진이의 콩팥을 이식받은 아저씨. 그는 내가 찾아오는 이유가 그저 교과서 복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성진이. 나에게 ‘중요한 일’을 말해주겠다고 했으나 그 길로 멀리 떠나버린 성진이. 이제 그 당시에 입었던 옷도 잘 맞지 않고, 게다가 복사집 아저씨는 장사를 접고 회사를 다니겠다고 한다. 과연 성진이의 콩팥을 가진 아저씨는 조금이라도 성진이를 닮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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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란한 빛이 소리와 결합하면서 일순간 만들어내는 크리스털 이미지, 이렇게 빛이 울리는 먹먹한 순간이야말로 명지현의 소설이 포착한 두렵고도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가 아닐까. 거기에 불멸이 있고, 불멸의 순간을 붙잡는 예술이 있다. 겁이 나고 무서운 순간이다.
_복도훈(문학평론가)
▶ 명지현 | 경기도 파주 심학산 인근에서 남편과 두 자녀, 그리고 백구 한 마리와 살고 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다큐멘터리 방송작가를 거쳐 2006년 『현대문학』에 「더티 와이프」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 초판발행 | 2009년 8월 26일
* 145*210 | 264쪽 | 값 10,000원
* ISBN 978-89-546-0870-1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이경록(031-955-8865, 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