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신춘문예 등단 이후 이십여 년 동안 시를 놓지 않았다.
‘오리’ 시인 유강희의 첫 동시집
치기 어린 문청이라고 하기에 유강희 시인의 스무 살은 특별했다. 그는 말수 적고 부끄러움 많은 스무 살 청년이었지만, 시 「어머니의 겨울」로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주변 문청들에게 자극과 용기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 이후 유강희 시인은 자신의 타고난 감수성과 시적 감각을 근원으로 맑고 정갈한 마음을 담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시를 쓰고 있다.
첫 시집 『불태운 시집』에 이어 십 년 만에 출간한 두 번째 시집 『오리막』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오형엽 선생은 “농촌 풍경에 얽힌 내면의 슬픔을 시간의 거리와 언어의 거리라는 이중의 거리로 투영함으로써, 독특한 시선과 문체를 지닌 서정시인의 면모를 보여준다.”라고 평한 바 있다. 작고시인 백석과 김종삼의 맥을 잇고 있는 유강희 시인의 서정성은 등단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결같다. 유행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서정시의 아련한 본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 ‘오리’ 사랑이 남다른 유강희 시인은 시집 『오리막』에서도 여러 편의 오리 시를 선보였다. 이번 첫 동시집에서는 ‘오리’ 발에 불난 사연까지 담고 있다. 유강희 시인에게 오리는 어떤 의미냐고 묻자, “거창하게 말해서 현재의 나에게 오리는 삶을 이끌어가게 하고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인 것 같다.”고 말한다. 거의 매일 강에 나가 오리를 본다는 시인은 오리를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삶의 활력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오리야말로 동심의 세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물 위를 유유히 헤엄쳐가는 오리도 실은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인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리는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참신한 발상과 감각이 그득하다.
“아,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하고 무릎 치게 만드는 동시들
『오리 발에 불났다』를 펴는 순간 아이들은 금세 드넓은 동시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생활 주변의 사물이나 일상의 익숙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유강희 시인의 동시에서는 새롭고 재밌고 특별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한 동시를 만난 아이들은 어느덧 시인과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앞에서 먹어도 토마토
뒤에서 먹어도 토마토
_「토마토」 전문
토마토는 거꾸로 읽어도 바로 읽어도 토마토다. 그런데 시인의 눈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앞이든 뒤든 어느 쪽에서 먹어도 역시 토마토라는 것을 발견한다.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두 행의 동시에서 우리는 참신함과 재미를 한 번에 맛볼 수 있다.
니 똥꼬
염소 똥꼬
만날 까만 콩자반만 좋아해
니 똥꼬
오리 똥꼬
니 학교 갈 때 궁뎅이 띠똥뙤똥
_「말싸움」 전문
아이들이 티격태격 말싸움하는 장면을 포착한 동시다. 서로 맞서며 상대를 놀려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하다. 염소 똥꼬, 오리 똥꼬를 들먹이며 싸우는 아이들이 귀엽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시인의 재치와 유머감각이 발휘된 동시라 할 수 있다. 유강희 시인은 마흔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주변에 있는 조카부터 동네 아이들, 지나가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 모두가 시인의 가슴을 달뜨게 하는 보물창고인 셈이다.
시골의 경운기를 ‘이상한 곤충’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재미있는 시선이다. “앞머리는 삐죽 나온 데다 / 손잡이는 더듬이처럼 길고 / 짐칸은 펑퍼짐하니 / 소리는 또 얼마나 요란한지”, 정말 경운기를 곤충으로 보자면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다. 또한 ‘돼지감자’를 “땅속에 웅크려 잠자고 있던 / 울퉁불퉁 분홍 코 돼지”로 보는 것도 신선한 관찰의 결과물이다. 어른의 눈이 아닌 아이의 눈으로 끈질기게 관찰하다 보면, 이처럼 생각은 점점 가지를 치며 확장해나간다.
‘시’라는 장르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참신한 발상이다. 한 끗 차이의 생각으로 식상한 것이 될 수도, 참신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시 쓰기를 어려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유강희 시인의 동시는 아이들이 시에 대해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도록, 우리말의 묘미와 우리 동시의 리듬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아이들은 시인의 생생한 표현을 통해 자기 주변을 새로이 보며, ‘나도 시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유강희 시인의 동시집에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동시, 아이들이 샘낼 만한 동시들이 한가득 담겨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도 좋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담긴 동시들
어린이문학평론가 김이구 선생은 이번 동시집의 해설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자연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크기가 크든 작든, 거리가 멀든 가깝든 상관없이 서로서로 감응하고 동조(同調)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평한다.
길을 건너다 얼룩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었다
그 위에 봄비가
자장자장 내린다
사람 대신 미안하다고
편히 잠들라고
자장자장 봄비가 내린다
_「봄비」 전문
절제된 감정으로 문명의 이기와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동시다. 죽은 얼룩 고양이 몸 위에 자장자장 내리는 봄비. 그 봄비는 고양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검붉은 피를 씻어주며 사람 대신 미안함을 표현한다. 이처럼 유강희 시인은 자연의 존재들을 서로 연결된 하나의 긴 끈으로 보고 있다.
새우 등이 굽은 건
엄마인 바다를
자꾸자꾸 껴안았기 때문
바다도 매일매일
어린 새우를 꼬옥
품 안에 안아 주었기 때문
_「새우 등이 굽은 이유」 전문
새우와 바다의 관계를 아이와 엄마로 바라보고 있다. 따듯한 바다 품에 안긴 새우는 어쩌면 등이 굽은 것이 아니라 더 꼬옥 안기기 위해 몸을 잔뜩 구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수지 얼음판 위로
기우뚱 뛰어내리는 물오리들
엉덩방아 찧는 오리
주둥이로 못을 박는 오리
앞가슴으로 걸레질하는 오리
지이이익 미끄럼 타는
오리들 발바닥에 불났다
불났다, 불났다, 불났다
호떡집이 아니고 저수지 한복판에
_「오리 발에 불났다」 전문
표제시 「오리 발에 불났다」에서는 생명력의 활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갖은 모양새로 얼음판에 뛰어내리는 오리들을 보며 시인은 ‘불났다’를 연방 외쳐댄다. 급하게 뛰어내리며 세게 미끄러졌으니 오리들의 발바닥은 불이 난 것처럼 뜨거울 것이다. 파닥파닥 움직이는 오리들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유강희 시인의 동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도 좋다. 순수 본연의 마음으로 자연과 생명에 대해 관찰하고 어울릴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모든 작고 사소한 것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 하나같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오래도록 관찰하고 그것들에게 다가가 그렇게 되어보려고 하는 사이, 어느 순간 마법처럼 그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요, 시의 시작인 것이다.
박정섭 화가의 앙증맞은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 편의 시를 연상하게 만드는 은유가 담긴 배경부터 익살스러움이 그대로 살아 있는 캐릭터까지 특유의 상상력으로 다채로운 그림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적 긴장감과 생동감, 재미를 세심하게 살펴 작업한 그림이 동시의 상큼발랄함을 더욱더 돋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