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퀴즈다!
“가장 위대한 퀴즈는 바로 인간인 것 같아.”
“그럴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해. 인간이라는 그 어려운 퀴즈에 지쳐서 사람들은 퀴즈쇼를 보는 것 같아. 거긴 그래도 답이 있잖아.”
“그런데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누가 자기 자신을 알겠어?” _본문에서
시티헌터 김영하, 2007년 도시로 돌아오다
: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21세기 청춘의 풍속도
1995년, 소설가 김영하가 데뷔한 지도 어느덧 12년이 넘었다. 등단 후 일 년 만에 작가는 제1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그야말로 “비범하고 충격적인 신예의 탄생”을 예고했고,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왔다.
특히, 『호출』과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오빠가 돌아왔다』 등 단편들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 타인과의 연대에 대한 무능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명쾌하고도 아이러니하게, 또한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며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장편들에서는 독자들에게 늘 새로운 실험을 선보여왔다.
허구와 역사적 고증을 적절히 결합시켜 탄생해낸 이야기 『아랑은 왜』,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이주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경영을 강렬하게 그려낸 『검은 꽃』, 전형적인 386세대, 미로 속을 헤매는 카프카적 인물을 통해 21세기판 『광장』을 선보인 『빛의 제국』 등은, 발표 당시 언제나 독자들에게 “어, (도시적 감성의 대표작가) 김영하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으며 동시에 “역시 김영하!”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자, 그런 김영하가, 2007년의 서울, 그리고 스물일곱 젊은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시티헌터 김영하의 청춘소설’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대를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성장담이고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십대에 PC통신을 경험했고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어쩌면 나는 익명의 인간과 인간이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친구와 연인으로 발전해갈 수 있음을 알게 된 첫 세대일지도 모른다. _‘작가의 말’에서
5·18 광주의 해에 태어난 그들은 20세기 말에 성인이 됐고, 2002년 월드컵과 대선을 통해 사회적 집단이 됐습니다. 붉은 악마 열풍의 주역이었던 그들은 집단적 열광과 일체감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서태지 같은 국민적 스타 출현이 불가능한 시대에 홀로 자기 인생의 중요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_2007년 2월 12일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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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생.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던 해에 태어나 컬러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를 보며 자랐고, 서태지에 열광하며 성장기를 보냈고, IMF 금융위기를 지켜보며 그 동안 향유했던 경제적인 풍요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실감했고,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하는 것을 목격했던 세대. 외국의 광고판에서 우리나라 배우들의 얼굴을 보게 된, 외국인을 만나도 주눅들지 않는 코스모폴리탄 1세대. 이제 이십대 후반이 된 이들 1980년생 젊은이들의 내밀한 욕망은 무엇인가.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어떤 풍경인가.
부모 없이 외할머니와 함께 자랐다는 것을 제외하곤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이민수.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다운받아놓은 미국 드라마를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이 고작인 그의 일상은 외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외할머니가 남겨놓은 거액의 빚 때문에 빈털터리로 길바닥에 나앉게 된 그는 햇빛 한줌 안 드는 1.5평 고시원에 자리잡고 편의점 ‘알바’를 하며 근근이 생활한다.
“창, 필요해요?
“……”
“창문 몰라요, 창문? 이렇게 네모난 거.”
“아, 창이요?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창문 있으면 이만원 추갑니다. 방에서 인터넷 할 거예요?”
“그것도 추가예요?”
“랜선 깔린 방은 만원 더. 싫으면 식당에 있는 공동 컴퓨터로 하면 되고, 아니면 요 아래 피시방도 있으니까. 그럼 창문 있는 방에 인터넷은 없이, 오케이?”
“잠깐만요. 창문 없어도 될 것 같아요. 대신 인터넷은 좀 연결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현실의 창 대신에 빌 게이츠의 창,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를 선택했다. 그때는 햇빛이 소중하다는 것을, 한 달에 이만원 정도의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그에게 위안을 주는 건 인터넷채팅 ‘퀴즈방’. 참가자들끼리 문제를 내고 정답을 맞히는 과정을 통해 지적 유희와 쾌감을 맛보게 해주는 그곳에서 이민수는 ID ‘벽 속의 요정’ 서지원과 사랑에 빠진다. TV퀴즈쇼 구성작가로 일하고 있는 서지원은 ‘벽 속’에서 나와 또다른 누군가를 만나 진심 어린 소통을 꿈꾼다. 사람을 만나고 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고 난 뒤 상대를 만나는 ‘인터넷 세대’인 이들 80년생 동갑내기 커플은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는 중이다.
채팅을 하며 우리는 우리의 말과 사랑에 빠진다. 우리의 말, 우리를 대신하여 화면 위로 떠오른 문장들. 그 문장이 불러온 또다른 문장. 나의 문장은 너의 문장과 만나 그 다음 문장을 만들어내고 그 문장은 다시 예기치 않은 새로운 문장으로 몸을 바꾼다. 아, 내 몸을 떠나 생명을 얻은 저 말들, 또 그 말과 말들의 사랑.
그러던 어느 날, 편의점에서 해고당하고 고시원에서도 쫓겨나 오갈 데 없던 이민수에게 다가온 손길. 우연찮게 출연하게 된 TV퀴즈쇼에서 이민수에게 처음 접근해온 이춘성이란 사내는 천만원짜리 수표를 내밀며 은밀한 제안을 해오는데……
제가 볼 때 말입니다, 퀴즈는 작은 죽음입니다. (……) 잘 생각해보세요.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으셨습니까? 환한 빛으로 가득한 무대에서 내려와 어두운 객석에 와 앉을 때, 무대에 남아 있는 저들만이 살아 있고 이민수씨 자신은 죽어버린 듯한,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퀴즈란 지혜의 힘을 빌려 우연과 맞서는 인간의 운명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라는 굳건한 신념을 갖고 있는 이춘성이 제안한 것은 정신의 피와 살이 튀기는 실전 퀴즈쇼에 출전하는 것. 인터넷퀴즈방과도, TV퀴즈쇼와도 다른, 퀴즈 그 자체의 ‘절대가치’를 숭배하는 ‘그들만의 퀴즈배틀’에 참가하게 된 이민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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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적 감수성과 세련된 필치로 일찍부터 젊은 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는 이번 소설에서 가장 ‘김영하다운’ 면모들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2007년 2월,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 독자들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현재 네이버에서만 360건이 넘는 스크랩이 블로그에 올라 있고, 일간지 홈페이지에서는 독자들이 빠진 회를 다시 올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처음 쓰는 일일연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건 작가의 저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2007년 10월 연재가 끝나기까지 독자들과 함께 호흡해온 이 소설은 독자들로부터 ‘김영하를 되찾은 느낌’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렇다,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