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시인선, 시작을 말하다!
‘문학동네시인선’이 새롭게 출발한다.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1년 반 동안의 기획 기간을 거쳤다. 중견과 신인을 아우르면서, 당대 한국시의 가장 모험적인 가능성들을 적극 발굴해서 독자들에게 선보이겠다는 포부다.
이런 취지에 걸맞게 시집의 형태가 파격적이다. 수십 년 동안 관행처럼 굳어진 시집 판형에 일대 혁신을 단행했다. 오늘날의 시는 과거와 달리 행이 길어졌고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의 비중도 커졌다. 이것이 일시적인 양상이 아니라 현대시의 역사철학적 조건과 밀접한 것이라면, 차라리 그 필연성을 인정하고 잠재돼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이 ‘문학동네시인선’의 취지다. 단형 서정시 형태에 최적화돼 있는 기존 판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시집 판형을 두 배로 키우고 이를 가로 방향으로 눕혔다. 독자들에게는 가독성을 높인 시집을 제공하고, 시인들에게 더 급진적인 실험의 장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 최승호 시인, 그리고『아메바』
‘문학동네시인선’의 그 첫 포문을 여는 이로 시인 최승호를 초대했다. 문학동네시인선의 기획위원을 맡은 평론가 신형철과 시인 김민정은 머리를 맞대고 오래 고민을 했다. 그들이 찾는 그 일인의 기준은 분명했고 다행히 일치했다. 열린 감각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거, 시나 시인으로 베가본드여야 한다는 거, 말보다 발을 먼저 뻗고 속보다 손을 먼저 내밀 줄 아는 이른바 ‘몸’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거.
시인 최승호를 만나 우리 시인선의 취지를 전했다. 그는 시의 재미란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뭔가 골똘한 표정이었다. 마치 지금 오고 있는 이 느낌이 시인가 아닌가, 설렘으로 가늠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이내 명쾌해졌다. 그리고 ‘문체 연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방식처럼 평소에 써온 시들을 때가 되어 단순히 한데 묶는 것이 아니라 그는 시에 있어 어떤 방법적인 실험을 시험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그’다운 시도였고 동시에 문학동네시인선의 정신과도 한 맥에 놓인 취지였다.
최승호의 시집 『아메바』는 그
일러두기를 통해 미리 밝힌 바와 같이『아메바』는 시인이 그간 펴낸 열두 권의 시집을 토대로 생겨났다. 소제목을 붙이고 본문보다 글씨 크기를 줄인 58편의 작은 詩行들을 앞선 시집들에서 고르고 이를 토대로 세 가지, 혹은 네 가지로 자유롭게 확산되거나 오므라드는 발상의 변주를 자유자재로 적어나갔다. 예를 들면 이런 스타일이다.
18 과일바구니 과일바구니 속의 악몽이란 빈 과일바구니를 한없이 뜯어먹는 벌레꿈 같은 인생을 말한다 | 18-1 지구덩어리만한 사과를 갉아먹는 벌레들을 생각할 것 한반도만한 나뭇잎을 뜯어먹는 벌레들을 생각할 것 18-2 앵무새의 악몽이란 새장을 뜯어먹고 또 뜯어먹어도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18-3 낙타들의 악몽이란 코뚜레를 우적우적 씹어먹어도 코뚜레가 찌르고 있는 코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18-4 굴비들은 죽어서도 악몽을 꾸는 것 같다 입을 벌린 채 비명을 지르면서 |
이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힘이 있다면 그건 바로 상상력을 넘어선 직관이다. 대상을 꿰뚫어 한방에 숨통을 끊는 날카롭고도 예리한 독화살 같은 시인의 눈. 시인의 눈은 어둠 깊은 곳이나 물속 가운데 손전등처럼 길을 낸다. 그 뒤를 좇는 일이란 시인처럼 눈으로 말하는 훈련법의 일환이 아닌가.
이번 시집 속에 포진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시의 문장들을 보면 하나같이 벌거벗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옷이나 화장이나 장신구 같은 꾸밈의 도구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 시 속에서
우락부락한 우럭 두 마리가
수족관 안에서 격렬하게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
곧 죽을 텐데 죽도록 싸우다니
하긴 멍하게 있다가 멍하니 죽는 꼴도 우습다 -「12 횟집」 중에
● 시인의 말
얼마 전 나사(NASA)는 비소(As)를 먹고 생존하는 새로운 생명체의 존재를 발표했다. 비소를 먹고 사는 놈이 있다니! 나는 그놈도 한 영물(靈物)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텅 빈 채 죽은 것처럼 보이는 허공이야말로 크고 작은 모든 영물들의 어머니로서, 수도 없이 많은 영물들을 낳고 그들의 진화와 생멸을 주도해온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독자들에게 좀 생경할 수도 있는 이번 시집은 그동안 쓴 나의 시들을 되비치어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일종의 문체연습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소를 먹고 사는 그림자 생명체가 있듯이, 낱말이나 이미지를 먹고 자라나는 언어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아메바(amoeba)라고 불러본다.
2010년 겨울
최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