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시인선, 시작을 말하다!
‘문학동네시인선’이 새롭게 출발한다.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1년 반 동안의 기획 기간을 거쳤다. 중견과 신인을 아우르면서, 당대 한국시의 가장 모험적인 가능성들을 적극 발굴해서 독자들에게 선보이겠다는 포부다.
이런 취지에 걸맞게 시집의 형태가 파격적이다. 수십 년 동안 관행처럼 굳어진 시집 판형에 일대 혁신을 단행했다. 오늘날의 시는 과거와 달리 행이 길어졌고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의 비중도 커졌다. 이것이 일시적인 양상이 아니라 현대시의 역사철학적 조건과 밀접한 것이라면, 차라리 그 필연성을 인정하고 잠재돼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이 ‘문학동네시인선’의 취지다. 단형 서정시 형태에 최적화돼 있는 기존 판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시집 판형을 두 배로 키우고 이를 가로 방향으로 눕혔다. 독자들에게는 가독성을 높인 시집을 제공하고, 시인들에게 더 급진적인 실험의 장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 송재학 시인, 그리고 『내간체(內簡體)를 얻다』
『내간체(內簡體)를 얻다』. 문학동네시인선의 출범과 함께 출간된 시집이자 올해로 데뷔 25년을 맞은 송재학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이기도 하다. 송재학. 그 이름 석 자야 문단 안팎에서 자주 호명되던 익숙함이라지만 조금만 그 시라는 둘레를 벗어나도 낯설다, 어렵다 하는 이들이 불쑥불쑥 손을 들 때가 있다. 해설을 쓴 권혁웅 시인이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송재학 시인의 시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가 있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시가 수사와 이미지에 경사되어 있어서 의미의 교란(곧 모호성)을 수락하고 있다는 비판일 게다. 모호성, 그러나 어느 시인들 시인인들 그 어떤 애매함이 애매함으로 읽히지 않겠는가. 시인은 타협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타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가지고’ 욕망의 교두보로 삼는 일에 몸서리를 치기 때문에 시를 ‘가지고’ 부릴 수 있는 모든 욕심에서 두 손을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된 관념인 ‘죽음’에는 어떠한 감상적인 끼임 하나 없다. 참으로 건조하며 한편으로는 잘 마른 빨래처럼 진중한 가벼움이 있다. 이렇듯 속내로는 다져진 죽음의 사유가 이제는 형식의 틀로 완성될 때가 아닌가, 시인 이 제목으로 올린 ‘내간체’와 ‘얻다’라는 말에서 나는 힌트를 얻어간다.
울 어머니 매년 사진관에 다녀오신다
그곳에서 아버지 늙어가시니
어머니 미간의 지층을 뜯어내면
지척지간 아버지 주름이다
굵은 연필이라면 머리카락 몇 올 아버지 살쩍에 옮겨
늙은 목탄 풍으로 바꾸는 게 어렵지 않다지
그때마다 깃 넓은 신사복은 찡그리면서
아버지, 어머니 그림자처럼 늙으신다
하, 두 분은 인중 닮은 이복남매 같기도 하고
오누이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고민은 할미의 얼굴로
어떻게 젊은 남편을 만나느냐는 것이지만
하, 이별의 눈과 입도 한 사십 년쯤 되면
다정다감하거나
닳아버리고
걱정하면서도
설렌다,
라고 되묻는 식솔들이 생기나보다
집이 생긴 별의 식솔들도 따라오나보다
-「죽은 사람도 늙어간다」 전문
송재학 시인의 이번 시집은 앞선 시편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중되는 속도가 빨랐다는 얘기다. 시인은 죽음을 본다. 그것도 그저 바라본다. 죽음이 죽음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뼈다. 뼈 너머의 가계다. 가계 너머의 내력이다. 시인이 왜 하필 ‘내간체’를 맨 위에 올렸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검색을 해본다. 첫째, 문장의 주체가 부녀자이고 둘째, 우리 말글로 쓴 것이며 셋째, 실답고 정다운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라는 설명에서 무릎을 탁 치게 된다. 그는 이 ‘내간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죽음의 안팎을 완성해가고 있던 것이다. ‘~葬’으로 끝나는 연작 시편들, ‘책(冊)’, ‘몽고’, ‘적석목관분’ 등을 보라. 이렇듯 시인은 죽음을 봉합할 뚜껑을 얻고자, 그렇듯 죽음의 사유에 완벽한 코르크마개를 꽂으려, 평생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이가 아닐는지.
● 시 속에서
소리는 담금질에 겨우 눈뜨면서
궁상각치우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래서 겨우 풋울음 하나가 여린 잎새처럼 만들어지는 거지
이건 아직 소리가 아니지 입보다 귀가 더 밝은 울음이야
소리가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소리를 귀에 달아야 할까
초록색 흰색 붉은색은 죄다 소리,
쓴맛 신맛 단맛도 죄다 소리,
그걸 모두 챙겨봐야 둔탁할 뿐,
—「징」 중에서
● 시인의 말
내 시의 안팎이
풍경만이 아니고
상처의 안팎이기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시가 때로 상처의 무늬와 겹쳐진
오래된 얼룩이었으면 합니다.
새 식구 현진이(남, 31세)와 뿡이의 웃음이
시리도록 눈부시다는 것도 덧붙입니다.
2010년 빗소리 속에서
송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