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춤을 춥니다. 떼굴떼굴 구릅니다. 사뿐사뿐 날아갈 듯합니다. 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우리말, 우리글이 만들어 내는 율동이 어떻게 이렇게 흥겨운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때론 이가 시리도록 상큼하고 어떨 땐 오월 햇살처럼 눈부십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뜻은 더욱 기막힙니다. 정완영 할아버지가 쓰시는 시는 이처럼 리듬감 넘치고 뜻이 맛깔스럽습니다. 도대체 어떤 시이기에 이렇게 재미있는 것일까요. 정 할아버지가 쓰시는 시는 우리 선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오랜 옛날부터 짓고 읊어 온 시노래(詩歌)입니다. 이를 우리는 ‘시조(時調)’라고 부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시요, 노래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조엔 몸 안에 음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정 할아버지가 쓴 시조를 읽으면 어깨춤이 절로 일어납니다. 앞뒤가 딱 들어맞게 술술 이어 가는 말 부림이 시원시원하고 재미있습니다. 쉬우면서도 뜻이 깊고 또 깊은 공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_권갑하(시조 시인)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보는 이도 없는 날에
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하다.
울고 있는 뻐꾸기에게, 누워 있는 감꽃에게
이 세상 한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하다.
-「감꽃」전문
아흔셋, 노시인의 시는 감꽃 둘레보다 환하고 그윽하다
아흔세 해를 살아온 노시인이 손자손녀들을 위해 씨 뿌려 둔 시를 수확했다. 현대시조문학의 큰 봉우리로 민족시의 맥을 잇는 계승자로 곤궁한 동시조 문단을 일군 참일꾼으로, 시조시단의 외길을 걸어온 그. 시조 시인으로서는 처음 이름을 딴 문학관(김천 백수문학관)이 세워질 만큼 그의 시혼과 업적은 견고하다.
문학동네에서 이번에 펴낸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은 수십 년의 시력이 응축된 시비이자 백수를 바라보는 즈음에 “시의 장인”이 내보일 수 있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특히 작가 층이 얇은 동시조집이라 의미는 더욱 크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조집(『꽃가지를 흔들 듯이』)을 낼 만큼 “우리 정신의 본향”인 시조가 어린이들에게 가 닿기를 소망해왔던 시인은, 새로 쓴 동시조들에 60년 동안 써온 시조들 중에서 어린 벗들과 같이 읽고 싶은 작품들을 보태 묶었다. 한 수 한 수 음미하며 사람 사는 도리와 자연의 순리를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 시인의 오롯한 바람이다.
“석 자 꽃가지에만 올라앉아도 달팽이는 하늘을 만진다는데, 팔천육백 미터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서도 하늘이 거기 없다고 사람들은 탄식을 합니다. 달팽이는 꿈을 가꾸지만 사람은 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이 아닐까요. ‘굽은 길은 하늘이 만든 길이고, 곧은길은 사람이 만든 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만든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사람 사는 도리를, 자연의 순리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_정완영(시조시인)
3장 6구, 짧으나 울림은 긴.
45자, 사려 깊게 그리고 팽팽한 긴장을 담아.
3장 6구의 작은 바닥, 그러나 수많은 어휘와 수사로 메우지 않아도 정완영 시인의 시는 어느 시보다 약동하며 함의로 가득하다. 시인은 “3장 6구에는 우리 민족의 온갖 사고, 온갖 행위, 온갖 습속까지가 다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시조 3장이 너무 적어 자신의 생각을 다 담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삼라만상을 다 담고도 남을 정도로 큰 그릇”이라고 했다. 시인은 삼라만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45자 내외의 정형화된 틀거리에 억지로 욱여넣지도 단순히 받아쓰기하지도 않는다. 사려 깊고 팽팽한 시어에 눈으로 볼 수 없는 현상과 코로 맡을 수 없는 냄새와 혀로 맛볼 수 없는 식감과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까지 내면화하여 있었으나 있지 아니했던 것들의 속을 열어 보여 준다.
내가 사는 석촌 호수
밤이 자꾸 깊어 가면
불빛도 물속에 들어가
잠자리를 본답니다.
가끔은 흔들립니다.
아마 꿈을 꾸나 봐요.
-「꿈을 꾸나 봐요」전문
논에는 물이 가득
물속에는 하늘이 가득
우리 마을 개구리 소리
개굴개굴 모심는다
구름도
물속에 내려와
포기포기 모심는다.
-「개구리 우는 마을」전문
자수를 맞추기 위해서 고심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물 흐르듯 자수가 가락에 절로 따라오도록 해야 좋은 시조라 할 수 있습니다. 정완영 선생님의 작품을 읽어 보면 그 가락이 매우 자유로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과 글이 시조라는 형식의 옷을 입었지만 너무 잘 어울리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_권갑하(시조시인)
구십 평생을 꼬박 우리말을 가꾸고 삼라만상이 내는 ‘영양’과 ‘밥’을 나누기 위해 시조 쓰기 길을 걸어온 정완영 시인은 자연과 옛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야를 확장해 도시 생활과 오늘날 아이들의 삶도 돌아본다. 1부와 3부는 주로 자연을 노래한 시편들, 2부는 아이다운 친근함과 동심이 배어나는 시편들, 4부는 자연과 관계를 맺는 사람에 대한 성찰,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로 묶었다.
4부의 시 한 수를 옮겨본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고향 집엔
할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요
한 마리 참붕어 같은 흰구름이 놀러 왔대요
-「할아버지 연못」전문
진솔하고 정겹고 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아이인 척하지 않고 구태여 어른인 척하지 않는다. 정완영 시인의 시는 겸손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시 안에 들어와 앉게 하고 주변 경치를 즐기게 하며 사색하게 한다. 느긋하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