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좀더 재미있게,
신나게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리나는 어린 시절 내내 거짓말만 했다.
리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나 무대 위에 서는 연기자가 되고 싶었다.
산다는 게 이렇게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두통 같은 것인 줄 리나는 몰랐다. _본문에서
제39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한국일보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백신애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강영숙의 첫번째 장편소설 『리나』를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선보인다. 반국경적 삶의 기록이라 할 만한 이 소설은 열여섯에 국경을 넘어 스물넷이 될 때까지 낯선 나라를 떠돌아야 했던 소녀 ‘리나’를 앞세워 경계 밖의 삶을 끔찍하고도 동시에 경쾌한 필치로 펼쳐 보인다. 작가 특유의 건조한 문체와 무심한 듯한 블랙유머가 그 막막한 폐허의 풍경과 절묘하게 맞물리는 이 소설은, 한국소설이 이제껏 가보지 못한 미답의 영토를 넘어서며 공고한 모든 가치를 전복시킨다.
“당신들한테 안전한 데가 어딘데?”
브로커를 따라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스물두 명의 난민들은 모두 ‘P국’이라는 이상향을 품고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리나’는 P국에 닿지 못하고 탈출 도중 화공약품공장으로 팔려간다. 그곳을 시작으로 창녀촌 시링, 대규모 플랜트 공단지대로 흘러들기까지 리나는 살인, 인신매매, 마약, 매춘과 강간을 일삼는 온갖 너절한 인간군상을 경험하게 된다. 공단지대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사람들이 전부 죽자 리나는 또다시 홀로 국경 앞에 선다. 리나는 과연 국경을 넘어 가족들이 있다는 P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은 어느 순간 활짝 열릴 거라고 믿었다. 그 푸른 둑이 이쪽을 향해 파도처럼 몰려와 하늘이 열리듯 저절로 열릴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탈출자들을 고스란히 빨아들인 후 안전한 투망 안에 넣어, 마술처럼 국경 너머로 데리고 갈 거라고 믿었다.(11쪽)
끔찍한 동시에 경쾌한 유랑!
난민들에게 국경 너머의 P국은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곳이다. 리나는 P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국경지대를 떠돌며 무국가적 삶을 지속해간다. 국경이라는 선 하나로 인해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 꿈꾸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국가는 엄혹한 운명과도 같다. 국가와 가족을 모두 버리고 리나가 선택한 이들은, 집도 나라도 없는 벙어리 소년 ‘삐’와 가족도 없이 홀로 세상을 떠도는 전직 여가수 할머니와 같은 난민들이다. 국가 밖으로 떠밀려나온 이들은 인신매매, 매춘, 살인이 난무하는 비정한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국경을 넘어서는 리나의 이 낯선 유랑은 끔찍한 동시에 경쾌하다. 그 간극을 절묘하게 조율해내는 이 소설의 미덕은 특별하고도 흥미로운 에피소드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소설의 형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리나. 리나가 꿈꾸는 국경 너머 P국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꿈꾸는 좀더 나은 삶, 그토록 염원하는 내일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책 속에서
오늘의 이야기, 열여섯 살에 국경을 넘어 지금은 열여덟 살이 된 여자애 이야기. (……)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떤 인신매매업자 앞에 누워 있었어요. 그가 나에게 말했죠. 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 나한테 그걸 말해줄 수 있겠니. 그래야 널 풀어줄 텐데. 그는 옛날얘기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매일 밤마다 그에게 얘기를 들려줬어요. 국경을 넘운 얘기, 신발이 터진 얘기. 그는 재미있어했어요. 저는 부탁했죠, 그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아직 첫날밤도 치르지 못했다구요. 그랬더니 그가 말했어요. 네가 재밌는 얘기를 많이 해주면 만나게 해주지.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거짓말을 했어요. 첫날밤을 치르기 위해서.(115쪽)
리나는 창문에 얼굴을 대고 생각했다. ‘스물두 명이 모두 강물에 빠져 죽는다고 해도 황톳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걸. 강은 원래 흔적도 없이 다 삼켜버리잖아.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아무도 모르겠지. 우린 공중에 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25쪽)
추천의 글
우리는 신발보다 나라를 더 자주 바꾸며 다녔다, 라고 브레히트는 쓴 적이 있다. 브레히트들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다. 전쟁이나 기근, 천재지변이나 가난으로 인하여 제 나라를 버린 난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국경을 넘고, 숨어 살면서 가장 비천한 노동으로 연명하고, 수용소에 감금되고, 추방당한다.
여기 리나는 바로 그런 하나의 국가를 탈출함으로써 반국가적이 된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리나가 국가만이 아니라 가족을 버리기로 작정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더욱 분명해 보인다. 가족 역시 우리는 선택한 적이 없다. 그것은 국가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또 하나의 덫, 어쩌면 국가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엄혹한 운명일지도 모른다. 국가와 가족을 버리고 나서 그녀가 선택하는 새로운 식구들은 집도 나라도 버린 어린 소년 삐, 그리고 역시 혼자서 세상을 떠도는 늙은 여가수 같은 사람들, 그녀와 마찬가지로 국가 밖으로 떠밀려나온 난민들이다.
『리나』는 국가, 혹은 국경과 인간 사이의 기나긴 싸움의 기록, 아니면 무국가적, 반국경적 삶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시링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는다’는 창녀촌을, 한때는 공단이었으나 폭발 사고가 나서 폐쇄된 이래 산업폐기물이나 버려지는 오염된 땅을 근거지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 국가와 국경으로 촘촘히 분열되거나 찢긴 이 세계는 그 어떤 폐허보다 더 참혹한 폐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_최인석(소설가)
끔찍한 동시에 경쾌한 유랑. 특별한 에피소드의 다발로 이루어진 흥미로운 소설. _소영현(문학평론가)
아시아에 강림한 모더니티의 재귀이자, 모더니티에 대한 지독한 패러디. _이혜령(문학평론가)
강영숙의 『리나』를 읽다보면 국경을 넘어 대륙을 떠도는 열여섯 소녀 ‘리나’가 세계의 폐허 위에 우뚝 선 숭고한 거인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다시 보면 ‘리나’는 그만한 나이의 철없는 소녀일 뿐이다. 이 막막한 간극을 무심하고 중성적인 블랙유머의 문체로 절묘하게 조율해내면서 강영숙은 수천 킬로미터의 장구한 여로를 꿈인 듯 펼쳐 보인다. 리나의 낯선 여로가 한국소설이 이제껏 가보지 못한 미답의 영토라면, 그것은 이야기를 쌓으면서 이야기를 지우고, 우연의 산포에서 삶의 절실한 형식을 찾아낸 소설 문법의 새로움으로부터 우선 비롯되는 것이리라. _정홍수(문학평론가)
강영숙의 『리나』는 우선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것은 비단 문학적 소재나 공간의 확장뿐만 아니라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서사적 질감의 확대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이 기존의 한국문학과 차별화한 새롭고도 의미 있는 문학적 상상력의 한 지평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_제39회 한국일보문학상 심사평 중에서
* ISBN 978-89-546-1471-9 03810
* 145*210 | 384쪽 | 값 11,000원
* 초판 발행 | 2011년 4월 28일
* 책임편집 | 조연주 박지영(031-955-8865, 8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