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양아, 그 삭막한 동네에서,
그래도 조금은 편하고 행복한 시간이 있었니?
엄살이 아니라 길고양이들과 인연을 맺은 이래
불행감을 맛보지 않는 날이 드물다.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만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데뷔 시에서부터 고양이의 영혼과 공명하며, 고양이를 동반자로 삼아온 고양이 시인 황인숙이 길고양이를 다룬 장편소설을 출간한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등의 알려진 시집이나 『해방촌 고양이』 같은 산문집에서 고양이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소설의 형태로 단단하게 가다듬어진 이번 작품은 본격적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의 마음 안에 돌아다니던 조각 스케치 형태의 고양이들이 정교한 붓 터치를 입어 알록달록한 채색화로 완성된 것이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길고양이들의 때로 아기자기하고 때로 서글픈 이야기뿐 아니라,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정다감하고 진솔한 교류를 감각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허무해 내 나이,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
주인공 화열이는 스무 살이지만, 앳된 느낌이 나지 않는 조숙한 아가씨다. 고양이들의 엄마라는 책임감도 한몫했을지 모르나 사실은 버려지고 또 버려진 경험 때문이다. 사업 실패 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아버지,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결혼한 후 마음의 빈 곳을 채우지 못해 떠나버린 소녀 같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아이일 수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화열이가 혼자 살고 있는 재개발 직전 낡은 시장 건물의 2층 방은, 비가 오면 망가지는 길고양이들의 스티로폼 집을 연상시키고 만다. 이기적인 주인들에게 버려진 후, 상처를 입어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길고양이들과 화열이는 닮아 있다. 그래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거나 손을 내밀지 않는 스무 살 화열이가, 고양이들에게는 마음이 기울고 마는 것이다. 특히 뚱뚱하지만 얼굴이 작고 예쁜, 비탈 고양이 베티와는 특별한 우정이 이어진다.
‘고양이웃네’ 사람들과 이웃 되기
버림받은 고양이들의 민첩하고 명랑한 영혼에 치유받는다 해도, 화열이는 언젠가 사람들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다시 고양이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런데 화열이도 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화열이의 곁을 파고든 사람들이 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인터넷 카페 ‘고양이웃네’의 회원들이다. 화장품 방문 판매를 하며 유학을 준비중인 혜조 언니, 반지하방에서 두 아이를 키워내면서도 활기를 잃지 않은 바리이모님, 인터넷 쇼핑몰을 하는 양야옹 언니, 친절한 회계사 그럭저럭 오빠, 소설가를 꿈꾸는 튕클 언니, 바람둥이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 전설 아저씨…… 거기에다 화열이 이모 식구와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 사람들, 베베치킨 배달원이자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친구 필용이가 더해져 어느새 왁자지껄해져버렸다. 화열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사람들로,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하다. 가까운 가족에게 받은 치명적인 상처는, 이렇게 바글바글한 이웃들 틈에서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다. 화열이가 겁먹지 않게 천천히 거리감이 좁아진다. 결핍을 채우는 것은 작고 반짝거리는 알갱이들인 것이다. 부드러운 완충재 속에서 화열이의 스무 살이 흐른다. 애묘가라면 더 즐겁게 읽을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사람 냄새 나는 사람 이야기라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내가 행복해야 고양이들도 행복해진다!”
가방 안에 사료와 때때로 간식 캔, 고양이 혀가 베이지 않도록 음식을 옮겨 담을 햇반 그릇을 들고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를 찾는 화열이처럼 작가도 실제로 고양이 밥을 주고 있다. 벌써 5년째이며, 2년 전부터는 하루에 두 번씩이다. 소설에도 나오듯이, 골목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고양이들에게도 고양이 밥 주는 사람에게도 사람들은 쉽게 적대적이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시인이 사람들의 적의에 매일 받았을 상처, 그럼에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을 헤아리게 된다. 사랑, 이웃, 생명, 위로, 자유…… 대도시의 뒷골목 쓰레기통, 공사장 자재 사이, 외진 주차장에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걸 아는 이들은 결코 지치지 않음을 말이다.
줄거리
화열이가 인터넷 커뮤니티 ‘고양이웃네’를 처음 알게 된 건 3년 전이다. 그때 화열이는 이모 집에 살고 있었는데, 사촌 언니가 귀한 품종인 터키시 앙고라 ‘도도’를 키웠기에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정이 격한 이모부가 털이 날린다며 도도를 벽에다 던지는 등, 갈등의 골이 깊어져 도도는 다른 집에 보내진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화열이는 검정고시는 보았지만 대학 진학은 보류중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댁을 잠시 지키며 독립한 화열이는 이어 낡은 시장 건물 2층에 방을 구해 머물기로 한다. 편의점에서 늦은 시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 화열이 눈에 길고양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띄엄띄엄 사흘에 한 번 밥을 주던 일이 한 새끼 고양이의 죽음을 계기로 매일 빠지지 않는 일과가 된다. 비탈 동네의 베티와 삼색 고양이들, 아비와 다른 길고양이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면서, ‘고양이웃네’ 사람들과도 점점 가까워져간다.
베티 밥을 주다가 만난 베베치킨 배달원 필용이 역시 자퇴를 했다. 언뜻 불량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순수한 성격에, 어릴 때부터 놀라운 미성으로 노래를 해온 필용이다. 필용이는 그저 답답한 학교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풋풋한 사랑이 움트고, 화열이는 아주 작은 일에도 필용이를 떠올린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 헤어진 엄마의 소식을 듣고, 화열이는 처음에는 두려움에, 나중에는 반가움에 눈물을 흘린다. 어느새 화열이는 시를 쓰게 되는데,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자 시인인 정운경 선생님을 찾아뵙고 큰 도움을 얻는다.
책 속에서
그래, 이제는 더이상 춥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을 거야. 비가 한 번 올 때마다 날씨는 추워지고 한겨울이 될 텐데. 이제 곧 네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겨울이 올 거란다. 작은 고양아, 그 삭막한 동네에서, 그래도 조금은 편하고 행복한 시간이 있었니? 아무 인간도 지나다니지 않는 한밤에는 뛰어놀기도 했니? 네 형제들과 엄마는 네가 죽은 걸 아니? 어쩌면 이미 다들 무지개다리를 건넜거나 다른 동네로 떠나 너 혼자 남았던 거니? 고양이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한다. 길어야 여섯 달이 지나면 다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살겠어? (76쪽에서)
와락 쓸쓸해진다. 사람들도 그럴까? 그토록 오순도순 지내던 형제들이 커서 제 아이들을 갖게 되면 눈빛조차 차가워지고 갑자기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된다. 서로가 생존에 위협이 되는 라이벌일 뿐이라는 듯. 어른이 된다는 건 쓸쓸하고 무서운 일 같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더욱더.
삼색이들이 냥냥 밥을 먹는데 할머니 두 분이 비탈길을 올라오셨다.
“고양이들 밥 주나봐?”
나는 찔끔해서 입을 꾹 다물고 할머니들 표정을 살폈다. 내 경계심을 느꼈는지 말을 건네셨던 할머니가 눈빛으로 ‘고양이한테 별 적의 없음’ 신호를 보내셨다. (171쪽에서)
작가의 말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한 끼 밥을 먹인 지 5년 돼간다. 2년 전부터는 하루 두 번 나간다. 비탈 꼭대기에 살면서 그쪽 고양이들을 먹이던 한 아주머니가 이사를 가며 간곡히 맡긴 곳이 두 채의 연립주택 사이 좁다란 틈인데, 지하방 창문들이 그리로 나 있다. 그러니 어두워진 뒤에 접근하면 그 거주자들 심기가 편치 않을 터라 낮에 다녀와야 한다. 도대체가 성실과는 거리가 먼 내 체질에 단 하루도 빼먹을 수 없는 그 ‘업’을 수행하자니 심신이 이만저만 고달픈 게 아니다. 가장 지겨운 건 고양이 밥 주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다. 매번 초긴장 상태로 다닌다. 거기에 더해 사람 손에 크다 버려진 고양이들이 하루하루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고통이라니…… 엄살이 아니라 길고양이들과 인연을 맺은 이래 불행감을 맛보지 않는 날이 드물다. 가뜩이나 없는 기력이 다 소진되고 신경쇠약 직전이다. 내가 글 쓸 염을 영 못 내는 건 그 영향이 큰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내 큰 소원은 고양이 밥 주는 일을 대신할 사람을 고용하는 거다. 한 달에 30만 원이면 동네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형편이 될 때까지 내가 고용된 셈 쳐볼밖에. 한 달에 30만 원이 생긴다 생각하니 좀 힘이 나는 것 같다.
어차피 주는 밥, 불안하고 시무룩한 마음을 떨치고 기꺼이, 행복한 마음으로 줘야겠다. 밥 먹는 그 시간이라도 고양이들에게 오직 행복한 기운이 전해지도록. 내가 행복해야 고양이들도 행복해진다. 내가 행복해질 길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를 찾고, 앞으로는 열심히 쓰자. 불행의 되먹임을 행복의 되먹임으로 바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