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책 소개
1.
이홍섭 시인이 돌아왔다. 1990년 데뷔 이래 20년이 넘는 시작 활동을 해왔음에도 그사이 펴낸 시집이 세 권에 불과했던 과작의 그가 지금 여기 한 권을 보태 네 권으로 그의 시력을 살찌워냈다. 『강릉, 프라하, 함흥』을 시작으로 『숨결』에 이어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이 2005년에 출간되었으니 햇수로 6년 만이다. 『터미널』이란 문패를 단 집으로다.
시인이 줄곧 써왔던 시들의 궤에서 이번 시집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늘 그랬듯 정갈하고 단정한 이미지와 단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서 돌보지 않았던 어떤 평범함에서부터 비롯된 바 큰데, 이를 목전에 올려두고 보니 또한 묘하게도 새롭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그것, ‘심금’이라는 심장의 떨림판을 건드리는 탓일 건데 너무 세고 너무 자극적인 데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어쩌면 이 ‘살짝’은, 이 ‘건드림’은 오히려 신선한 충격이 아닐까 한다. 너무 여리고 너무 연해서, 그렇게 느린 것이 이 시대는 따르지 않는 옛 시인의 숨결 같아서 말이다.
2.
서울에서의 삶을 등지고 그는 강릉에 터를 잡았다. 영북(嶺北), 산줄기 너머 북쪽. 우리가 알고 있는 그곳은 이홍섭이 가리킨 그곳과 같을 수 있으나 지형의 가르침을 받아 적은 말은 아마도, 다를 것이다. 시인에게는 더욱 내밀하고 더욱 순정한 영북이 있다. 눈의 결정과도 같은 원형질의 공간. 지척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름다운 고립 속에 있다.
간밤부터 폭설이다
내 살과 뼈가 된
강원도 오지 마을들은 또 두절이다
이런 날, 젊은 어머니는 백설기를 찌시고
천장에서 싸리꿀을 내리셨다
토끼 같았던 내 눈과 귀는 이내 순해져갔다(「폭설」전문)
시인은 겸허하게, “나아가고 나아간 뒤 다시 이 붉은 언덕으로 퇴”했다고 했다. “더는 퇴할 데 없는 자리임을 알”았다고 했다. (「붉은 언덕-지변동」) 그러나 그가 말하는 ‘퇴(退)’의 의미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물러나고, 그만두고, 피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이홍섭에게 나아감과 돌아옴은 일생을 가로지르는 화두에 가깝다. 멀리 나아갔으니 제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점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나아갈 일만 남았다. 그리하여 시인은 잘못 들은 화두로 오히려 한 소식 한 스님처럼 말한다. “고향에 돌아왔으니 이제 고향은 저 멀리 던져버려야겠다”고. (「귀거래, 귀거래」) 이에 대해 역시 시인이자, 이 시집의 해설은 쓴 박형준은 이홍섭의 고향이 “존재의 근원으로서 돌아가야 하는 그리움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의지의 장소”라 짚어낸다. 이 시집은 고향을 지리적 차원으로 삼아 안주하려 함이 아니며 “사라지거나 잊혀진 존재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움으로써 드넓은 세상과 만나려는 정신적 차원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본다.
자작나무 떼를 지나온 하얗고
투명하고, 수정처럼 차디찬 바람 말일세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이 바람을 맞고 싶어서이지
창을 열면
거기 흰 갈기를 날리며
수백 마리 백마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지(「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부분)
3.
돌아오기 전 이홍섭은 “일평생 삼박사일을 꿈꾸던 사내”(「묘비명」)였다. 삼박사일과 또다른 삼박사일의 접점이 되던 공간이 바로 터미널이다. 세속에서 구원으로, 구원에서 세속으로 오갈 수 있는 접점. 실체적 추억의 공간이자 삶의 연속성에 대한 비유로 터미널보다 좋은 비유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 터미널은 지하 1층 지상 3층
지하에는 장례식장
지상 3층에는 산부인과
그 사이를
늙고 병든 환자들이 오간다
사람들은 3층에서 태어나
지하로 내려갔다가
검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퀭한 눈으로
주머니 속의 차표를 만지작거린다(「터미널4」 전문)
이 시집의 제목이자, 가장 중요한 연작인 「터미널」은 모두 아홉 편이 실려 있다.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 자 모퉁이에서 아이를 업고 모퉁이가 닳도록 오가며 울음을 참는 앳된 여인(「터미널2」), 한때 머물렀던 터미널인 어머니의 자궁이 들어내졌던 날(「터미널3」), 터미널에서 이제 떠나는 부처가 제자 아난다에게 하는 이야기(「터미널9」) 등 호흡을 잠시 빼앗는 근원적 단상들이 빛난다.
4.
이홍섭의 시에는 “더덕 애순 같은 지순함”(「종재기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시인에게는 마흔 넘어 얻은 시 같은 아들이 있는데, 세상 모든 미물이 이 아들만큼이나 귀하다.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 장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 마리도
여기 이 세상의 어여쁜 주인이시다(「주인」 부분)
새끼 다람쥐 여린 등에는 줄무늬가 다섯 개, 꼬리 끝까지 이어진
시리디시린 운명줄이 한 개(「다람쥐」 부분)
꽝꽝 얼어붙은 강 밑에서
내장까지 다 보여주며
나 좀 봐, 나 좀 봐 하는 빙어를 보면
꼭 이놈이 시 같다(「영북嶺北」 부분)
멀리 돌아온 시인은 결코 어여쁘지 않은, 탁하디 탁한 세상 역시 분명 목격했을 것이다. 시인이 “삶은 굽이굽이 멀미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멀미」)이라며 모진 굴곡에 대해서 얘기할 때나,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등대」) 하고 읊조릴 때 우리는 어떤 그림자를 감지한다. 그런 시인이 고향에서 이 찬란한 미물들을 마주하는 장면은 읽는 이들의 시심(詩心)도 겨웁게 한다.
이 맑음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어떤 여과의 과정이 있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손님”(「생일」)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독한 세상을 걸었을지 말이다. “그래도 명치끝에는 언제나 맑은 옹이가 남아 있”었다는(「민들레」) 깨침은 또 얼마나 오랜 후에 찾아왔을까. 시인은 아마 “입술에다 무거운 자기 몸 전체를 걸고”(「입술」) 기다렸을 것이다. 시로써 궁구했을 것이다. 이 시집을 오래 읽으면, 오래 두고 읽으면, “비누가 없어도 비누거품 하나 일지 않아도 물처럼 만져지는”(「영월」) 시인의 맨얼굴을 혹은 시의 맨얼굴을 우리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시인의 말
산 첩첩하고 물 중중한 강원도 오지에서 자랄 때, 집 뒤에 대처승 가족이 살던 움막 같은 집이 한 채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내가 좋아하던 심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대처승에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고, 마당 가득 가난이 널려 있었다.
대처승은 늘 아침 일찍 마당에 나와 무연하게 먼 산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심배를 주우며, 입 안 가득 침이 넘치도록 신 심배를 먹으며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곤 했다. 그 이후 나는 삶이 턱없이 남루해 보일 때면 심배나무 아래 나를 세워놓고 그 텅 빈 마당을 떠올리곤 했다.
첩첩한 산 너머, 중중한 물 건너 무엇이 있으랴만, 이 삶의 오지에서 시 아니면 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는가. 서러운 자식 같은 시들을 마당 가득 널어놓고 보니, 지금까지 이어온 내 삶이 먼 산에 가닿던 그 무연함과 이를 바라보며 삼키던 심배의 그 징한 신맛 사이를 오간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물론 시도 그러했을 것이다.
2011년 7월,
이홍섭
책 속에서
어떤 별이 거기에 있어서
하여금, 나를 이 별에 오게 했는지 궁금할 때가 있지
이런 날이면
엉금엉금 내설악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보기도 하고
경포 바다 오리바위와 십리바위 사이에
오리무중인 내 청춘을 가만히 놓아보기도 하지
-오늘은 설악군의 바람이 차군, 또 코가 얼어버렸네
-오늘은 동해양의 파도가 높군, 또 키를 넘어버렸네
나는 거문고에 울음을 실을 줄도 모르고
돌에다 바음을 새길 줄도 모르니
종일 부뚜막처럼 앉아서 하여금이나 때고 있으려네
막대기를 휘휘 저으며
두 눈에 연기도 좀 넣으며
-「하여금_석남에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