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는 카프카만큼 나쁜 남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카프카는 한 여자와 두 번 약혼하고 결혼은 안 했다.
바로 그런 놈을 나쁜 놈이라고 하는 거다.
여자에게 헛된 꿈을 꾸게 하는 남자는 나쁘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대부분 카프카처럼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멋진 존재들이다.
그도 그랬다.
제5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가 이지민 첫 소설집!
2000년,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로 제5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이지민이 첫 작품집을 묶었다. 그사이 장편소설 『좌절금지』(랜덤하우스중앙, 2004)를 선보인 바 있으나, 그로부터도 사 년, 등단 후 팔 년 만의 첫 창작집이다.
“다 불만이에요. 얼굴이고 뭐고 다 싫어요.”
무너지는 ‘오늘’, 흔들리는 내 인생, 리모델링이 필요해
난 멈추지 않을 거야. 수술비 환불받고 다른 데 가서 또 할 거야.
내 눈에 찰 때까지. 어차피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속 변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거야. 그냥 예뻐지려는 게 아냐.
내가 선택하는 거라고. 내 운명도, 내 몸도, 내 영혼도.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에 수록된 아홉 편의 소설들은 대부분이 관계의 파멸과 파국적 사태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가계의 몰락을 경험하거나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에 고통받기도 하고, 배우자의 불륜을 방관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들을 겪는다. 그것은 무력하게 자신의 파멸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오늘’을 압축해서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불안과 공포의 하중이 점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아질 리 없는 ‘내일’을 예고한다. 어느 순간 세계는 내가 믿고 있던 그것이 아니다. 그 미묘한 차이 때문에 소설 속 인물들은 풀리지 않는 문제에 골몰한다. 그의 소설 속에는 이렇게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질문을 멈추지 못하는 젊은 영혼들이 배회한다.
결코 내 것이 되어주지 않는 사랑, 내 모습을 아름답게 성형해내고 싶은 욕망, 믿었던 동업자의 배신, 뜻대로 풀려주지 않는 사업, 돈만 아니었다면 예전에 버렸을 바람둥이 남편, 홀어머니에게서 사업자금을 뜯어내려 혈안이 된 아들……
이지민의 소설에는 모른 척하고 싶은 우리의 ‘오늘’과, 그러한 현실에 무력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아픈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을지언정, 이지민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은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현실이 주는 삶의 공포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렇게 작가는 우리의 삶 속에 만연해 있는 파멸된 관계와 파국적 사태를, 그리고 그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그려내 보인다.
● 한 달간 매일같이, 카페라테 톨 사이즈 한 잔이 다 식어갈 때까지 두 눈을 마주했던 남자. 그가 대뜸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축하해달라며 환하게 미소짓는다. 그에게 욕을 실컷 퍼부어주고 뛰쳐나온 뒤 두 달이 지난 어느 오후, 그에게서 힘들고 아프다는 엄살이 섞인 전화가 온다. 그리고 나는 그날부터, 그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기 시작한다._「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 새벽에 만취한 채 콘돔을 달고 들어온 후, 남편은 사고를 칠 때마다 늘 그랬듯 미애에게 선물공세를 퍼붓는다. 그러면서 이번에 투자한 영화가 잘될 것 같다며 자랑을 한다. 어느 젊고 철없는 부부가 서로가 정해주는 상대하고만 바람을 피우기로 한다는 내용의 <불륜 세일즈>라는 영화. 남편은 그 영화의 내용처럼, 장난삼아 미애에게 남자를 한 명 골라준다. 그리고 며칠 후 미애는 그 남자, 병우를 유혹해낸다._「불륜 세일즈」
● ‘나’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홍차 시폰케이크를 사들고 아파트로 찾아간다. 이제 효자 노릇은 때려치우고, 어머니에게서 기어코 사업자금을 받아낼 생각이다. 그런데 이미 낌새를 알아차린 어머니는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성지순례를 떠나버린 후다. 부들부들 떨면서 집을 나오려던 나는 발길을 돌려 주방으로 향한다. 어머니가 밀폐용기 타파웨어에 담아 주방 곳곳에 숨겨놓은 보석들을 찾기 위해._「타파웨어에 대한 명상」
삶의 위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끝나지 않은 변신 이야기
소설 속 인물들은 삶의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그리하여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지님으로써 상황을 돌파하려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변신의 과정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워지는 법은 결코 없다. 오히려 수차례의 해체와 조립을 거치며 마모되어 너덜너덜해지거나, 자신이 터부시했던 세속적인 현실의 모습을 닮아가거나, 아예 투명인간처럼 희미해져버린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과 위험을 이겨낸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또다른 변신을 꿈꾼다. 이들에게 ‘변신’은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의 삶을 구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변신이란 합리적인 이성의 잣대로는 알아볼 수 없고 해석이 불가능한(de-sign), 형상-되기(成-形)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변신의 능력이란, 아름다움을 사는(buy) 위력이 아니라 삶을 사는(live) 힘이라고 해야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그것이 변신의 귀재, 작가가 말하는 성형(de-sign)의 윤리가 아닐까.
소설 속 누군가가 묻는다. “도대체 너는 지치지도 않느냐”고. 주인공은 말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으레 지치기 마련”이라고. 인물의 대답은, 현실과 갈등하는 지점에 밀착해 있되 섣부른 비관과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솔직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작가 역시 변신중이라는 사실이다. 작가의 최초의 질문이 어떤 방식으로 소설 속에서 신생하는지, 그것이 이 작가의 변신을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이유이다. _양윤의(문학평론가)
* 초판발행 | 2008년 4월 9일
* 145*210 | 320쪽 | 값 10,000원
* ISBN 978-89-546-0558-8 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