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욕망의 도시, 미국 라스베이거스
일탈의 도시, 인도 찬디가르
위안의 도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다시 대한민국 서울을 살다
빨간색 하이바를 뒤집어 쓰고 있는 캐릭터와 ‘오기사’라는 필명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오영욱. 그는 건축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사실, 그가 하는 이 세 가지 일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여행을 다니며 본 도시와 건축을 그림으로 그리고, 책으로 묶는 작업이 벌써 네 번째다.
그는 현재 신사동 가로수길에 위치한 작은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각종 건물 내벽과 인쇄물에 그림을 그려넣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한 비밀여행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는 중이다. 게다가 틈틈이 강의를 하기도 하고 블로그에도 매일 그림일기를 올리고 있는데…… 아니, 이렇게 다재다능하고 유명한 이 분, 더 말해 무엇하랴.
짧게 말해, 그에게 여행은 ‘여행’이라 정직하게 부르기보다는 ‘답사’라는 좋은 명분이 가능하기에 그의 떠남은 언제나 자유롭고 즉흥적이다. (아, 부럽다!)
나는 일상에 대고 리모컨을 눌러 문득 다른 채널로 옮기듯이 갑작스럽게 어디론가 떠나는 걸 좋아했다. 그 어딘가가 조금은 익숙한 곳이든, 아예 낯선 곳이든 상관없이 가끔씩은 머리 위 하늘을 바꿔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낯선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사연들을 엿보거나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_ 프롤로그 중에서
그는 어딘가의 지도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것을 잠시 잊는다고 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도시는 손가락에 새겨진 지문처럼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그래서 지도 위의 모든 그림과 글자들을 지우고 그물처럼 얽힌 길만 남겨놓으면 그 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이번에 그가 지도를 펼친 곳은,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와 인도의 찬디가르,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각각의 대륙에 따로 떨어져 있는 데다가 그리 머지않은 과거의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신도시라는 사실 외에는 유사점이라고는 없는 이 세 도시들은 오기사에게 비슷한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세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첫 번째, 욕망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욕망 欲望
[명]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그에게 도시는 마치 여자와도 같았다. 그리고 도시 안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은 마치 속살을 훔쳐보듯 조심스럽고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특히, 라스베이거스의 경우는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도시를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 관한 전문적인 역사적.도시적 배경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카지노와 기타 향락시설이 주는 화려한 물질주의적 이미지로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혼자 라스베이거스엔 왜 가는 거지?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욕망이 건축으로 적용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욕망과 건축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선 건축이 곧 욕망이었다.
_ 본문 중에서
또, 미국을 노골적으로 상징하다시피 하는 맥도날드에 앉아 허기를 때우면서 1970년대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렇지만 같은 일을 했던 그는 벤추리를 향해 냉정하고도 정확한 일침을 날린다. 그렇게 곳곳에서 마주하는 건물들과 그 도시가, 낯선 땅에서 날아온 어느 이방인에게 들려주는 나지막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행복한 대화를 이어간다.
노골적인 상징은 목적에 집착한다. 1970년대,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는 새로운 시대의 건축이 지니는 상징성에 관심을 가졌다. 상징은 인간을 위한다는 근대 건축이 정작 잃고 있었던 인간성의 영역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감성들이다.
_ 본문 중에서
일탈 逸脫
[명] 1.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2. <사회>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자. 수없이 많은 매체에서 타지마할을 보고 또 봐온 터라, 그래서 가본 적도 없는 곳임에도 어쩐지 다녀온 느낌마저 들 만큼 식상하고 식상해져버린 인도의 랜드마크이지만, 오기사가 말하는 타지마할은 어쩐지 색다른 느낌이 든다. 우리를 이렇게 무장해제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매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쨌든, 오기사는 건축과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쉬운 언어로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필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타지마할은 멀리서 볼 때 더 아름다웠다. 손에 닿도록 다가가 상감기법의 문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벽은 슬프게 울었다. 이 죽음의 궁전은 왕을 위해 인생을 바칠 수도 있었던 시대의 건축이었다. 이 죽음의 궁전은 왕을 위해 인생을 바칠 수도 있었던 시대의 건축이었다. 눈이 부신 조각들을 위해 생명을 바쳤던 전근대의 영혼들이 겨울 안개처럼 흩날렸다.
_ 본문 중에서
다만, 그에게 타지마할은 인도에 왔으니 지나쳐 가는 곳 중에 하나였을 뿐. 그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찬디가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그곳이었다. 그곳은 곧 일탈을 의미했다. 일탈은 복제되지 않아야 한다. 복제되고 재생산되는 순간 일탈만이 줄 수 있는 그 미묘한 긴장감은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니까.
흔히들 도전, 혹은 실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이 도시의 매력을 되레 반감시키는 것 이라고 오기사는 말하고 있다. 도전이나 실험은 새로운 전형을 만들기 위한 것인데 찬디가르는 인도를 비롯해 그 어느 곳에서도 복제되거나 차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실패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도시가 오롯이 그 자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찬디가르의 건설이 실은 하나의 일탈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르코르뷔지에는 환갑이 넘어 인도를 찾아왔다. 그가 살던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남루한 인도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빛나는 도시’를 실현시키려 한 것이다. 그가 설계한 섹터 10의 어느 주상복합건물에 앉아 오기사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르코르뷔지에의 도면 속에 그려진 일부인 것 같은 행복한 기분을 느낀다. 그 기분 좋은 흥분이 오기사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을 타고 대한민국에서 원고를 읽는 우리들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된다. 현재 생존해 있지는 않지만 동종업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숨결을 그렇게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행운일 것이다.
도시 전체가 르코르뷔지에 스타일의 건물들로 차 있다. 사람마다 기쁨을 줄 수 있는 관심사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쁜 여자’만큼이나 관심이 있는 ‘르코르뷔지에’이기에 이곳은 나에게 천국의 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_ 본문 중에서
르코르뷔지에는 구조학자도, 재료 개발자도 아니었다. 그는 철근 콘크리트로 무미건조하게 집을 짓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무미건조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와 그에 부합하는 제반 기술이 갖춰진 새로운 시대에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내렸을 뿐이다. 지금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가 콘크리트 박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르코르뷔지에가 기둥이 벽 안쪽에 놓인 채 층층이 쌓아가는 도미노 시스템이나 근대건축의 5원칙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짓는 것이 가장 싸고 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르코르뷔지에는 내가 부러워 미칠 정도로 많은 건물들을 프랑스와 기타 세계 곳곳에 남겼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건축들은 개인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그리고 복제되지 않았다.
_ 본문 중에서
세 번째, 위안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위안 慰安
[명]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 또는 그렇게 하여 주는 대상.
불면증이 있는 사람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은 쥐약일 것이다. 하늘에서 ‘백야’라는 마법을 부려 한밤중에도 하얀 하늘을 드러내면 그 아래에서 눈을 붙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위도 48도 아래의 지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러시아를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루하루 실감이 날 정도로 하지가 가까워오고 있는 페테르부르크의 밤은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갔다. 꿈에 그리던 백야를 실제로 경험한 내 머리도 하얗게 비어갔다. 아무 생각이 없어도 괜찮은 그런 며칠 밤을 보냈다.
_ 본문 중에서
유럽에 편입되고자 수많은 노력을 해왔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유럽이 되는 것에 완강히 거부 반응을 보이며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러시아의 이중성은, 혹시 서방세계에 이중적으로 보이면 어쩌나 하며 늘 걱정을 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감성적으로 공감하기가 불가능한 대상이다. 결국 우리처럼 크기가 작은 나라의 크기가 작은 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감이 결여되어 조금은 위축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종종 스스로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인종과 나라들을 무시하면서 푼다.
_ 본문 중에서
이곳은 도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일정치 않게 뻗어 있었기 때문에, 지도 없이 걷다보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러나 오기사는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으니깐” 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헤매는 발걸음을 조급해 하지 않는다.
백야의 계절이 지나 어둡고 축축해지는 시기의 페테르부르크 도시는 겁에 질린 자신을 위로해줄 것 같이 느꼈을 것이다. 낯선 동양인이 길을 헤매는 동안, 도시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마치 ‘무서워하지 말고 자신을 믿으며 계속 가봐. 세상에서 가장 척박하고 고독한 땅에 일구어낸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봐’ 이렇게 말해주는 것처럼.
다시, 대한민국 서울을 살다
일상 日常
[명]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우리는 오기사를 통해 세계지도의 동서남북을 넘나드는 세 도시를 종횡무진 하는 중간에도, 일상의 도시, 서울을 만나게 된다. 서울은 무심한 듯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짧은 여행이 해결해주는 건 많지 않다. 물론, 추억이 남는다고는 하지만 일상의 힘이 너무 강하기에 곧 묻혀버린다. 그래서 여행의 단상들은 지난 밤 꿈처럼 희미해지고 말지만, 일상을 또 호기롭게 살아갈 원동력을 제공함에는 틀림이 없다.
주말에 티브이를 시청할 때만 빼고 웃지 않는 현대인들이 사는 곳, 욕망과 허영, 분노와 질투로 가득 찬 혼잡한 도시, 기대했던 일들이 모두 무산되는, 어딘가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데다 조금씩은 엉망진창인 것만 같은 서울.
그렇게 정신없는 서울이지만 우리는 또 열심히, 희망차게 살아내고 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