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안국동울음상점』을 펴낸 시인 장이지가 두번째 시집『연꽃의 입술』을 들고 왔다. 장이지는 첫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서 현대문명이 낳은 우울함, 기형적인 요소나 병적 상실들을 예리하게 노래한 바 있다. 이번 두번째 시집에서도 지난 세기 굵직한 역사적 골에 뿌리를 둔 발전의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를 짚을 수 있다.
온전한 ‘타자’를 찾아서
거대한 비극 앞에서 우리는 모두 타자여서 각기 다른 흐름 속에서 소외된다. 문학평론가 김미정은 이번 시집을 두고 “한때는 실재했고 필연이었으나 이제는 부재하는 듯 되어버린 모든 존재”의 이야기, “추상적인 부재가 아니라 발밑에 실재하는 구체적이면서 보편적인 부재와 흔적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시쓰기”가 “시절이 바뀌고 가치들이 바뀌어도 우리가 겪어온 사태들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데서 연유한다.
최근 현대시의 행보를 볼 때 온전한 ‘타자’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타자’를 향한 연민이나 위로의 정서를 찾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냉소와 풍자로 일관된, 배척하고 배척되는 타자들의 행보 위주인 것은 우리가 이 세계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열되고 파괴된 세계 속의 자아는 수단으로서 ‘타자’를 이용하고, 먹히고 먹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한다. 이런 오염된 세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비껴가는 것들, 무너지고 있는 것들에게 ‘위로’를 던지며 온전한 ‘타자’를 부르고 만져주는 시인 장이지가 있다.
구멍 뚫린 천장으로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남자들의 전쟁이 끝나고
역사가 불태워지자
아지랑이가 되었다, 몸이,
엉겅퀴 달이는 냄새가 아직도 나는데
용서할 권리마저 없이
아지랑이가 되었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다다미방에 이불이 한 채.
무너진 천장으로 쏟아지는 별빛에도
몸살이 날 것 같은데,
여기는 어디인가.
내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이라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좀삐’의 여인들 종군위안부의 넋이 ‘당신’에게」부분)
‘나’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 생을 유린당한 동시대의 타자들에 대한 애도
장이지의 시 속에서 훼손되고, 파괴된 시간은 곧 도래할 미래의 시간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의 공간에서 이 시간들은 한데 엉켜 공존하고 있다. 그 지평선 위에서 시인은 “수몰선 아래”를 쳐다본다. 그곳은 유년 시절에는 존재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구멍이다. 그런 “수몰선 아래”에서 우리가 바라보고 살아온 것은 어쩌면 “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벼이삭 끝에 맺힌 빗물에 우주가 맺”히는 것을 보며 “무”로 가고 있었다고 나직히 고백한다. 동시대에 공존하는 이 시간들은 그가 자신이 자라온 시대의 역사와 현재의 “시쓰기”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이지는 파괴되고 훼손된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어느 타자들을 구현해낸다. 그들은 식민지 시절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 이산가족, 종군위안부, 용정촌 주민, 제일 조선인 잔류자와 용산 참사 피해자까지 모두 세계가 만들어낸 아픔들과 맞닿아 있는 주체들이다. 한데 그들을 부르짖는 그의 어조가 예사롭지 않다. ‘타령조’에 가까운 이 어조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화자는 그 어조를 통해 일부러 상실감에 거리를 둔 듯하다. 문제의 바깥에서, 오히려 텍스트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 공간으로부터 화자를 멀리 배치해두어 이 스물스물한 고독이 어느 개인의 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어느 소수에 한정된 역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결국 우리가 ‘나’라는 사람의 타자임을 아주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상기시키고 있는 듯하다.
하늘도 이념도 달라 넘질 못하는
휴전선, 구름도 덜컹 넘어야 하느니.
그래, 꿈도 가다가는 가물어 목 끝이 타는 검은 방
오라바이 냄새 훗훗이 떠돌고, 곤한 아이 숨소리.
(중략)
상처에 좋은 곰국 손수 끓여
내 이남살이의 파 줄기 같은 설움도 숭숭 썰어넣겠네
어리신 오라바이는 신고산 타령을 불르우다.
아바이 태가 나나 봅새.
(「굳세어라 금순아 2 파 줄기처럼 매운 길 1960, 서울」부분)
그의 그런 성찰은 “누구의 행복을 위해 나는 시를 쓴 걸까”(「담벼락 고양이」) 하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그러다가도 그는 세계를 향해 따져 묻는다. “당신, 당신은 왜 저를 이렇게 작고 약하게 빚어놓았습니까?”(「당신의 방」) 그러나 그를 빚은 것은 절대자가 아니다. 그에게 절대자는 없다. 쓰는 것도 쓰여진 것에서도 구원이란 없다. 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것이 “우주의 선물”이라는 믿는 믿음만이 장이지에게 “위로의 시쓰기”를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쓰인 시편들은 모두 저마다가 가진 운명을 끌어안고 사는 상실한 자아들에 대한 위로이고 동질감이며 궁극적으로 ‘애도’의 의식에 가깝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의 주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애도하는 주체’, 다른 하나는 ‘사유하는 주체’다. “언제까지고 우리는 자연에 민폐를 끼치”는 “사라지는 것들을 허물며 사는” 애도하는 주체인 동시에 “언어의 괴저 위에서 그것이 캄캄한 괴지인지도 모르고 한평생 멍들어” 사는 주체다.
하지만 사유하는 주체는 말한다. “피 흘리는 글씨가 절벽을 내놓을 때면 우리 그날엔 천국을 구걸하지 말”자고, “절망에게 복수하고” 가자고.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노파가
등신대의 붓으로
해변에 한 글자를 쓰는 동안
백야의 꿈이 검은 파도에 젖는다.
위안부 할머니 얼굴에 파인
주름살이 파도처럼 계속 밀려온다.
(중략)
백사장에 쓴 글씨가
무형의 미친 바람이 되어
방풍림의 검은 산발 위로
사라지는 동안
하얀 연꽃이 바다 위로 솟아오른다.
연꽃이 열리자
검은 먹물에 휘감긴
어두운 꿈이 알몸을 드러낸다.
(「구원(久遠) 2 묵화(墨畵)」부분)
장이지의 “연꽃”은 피어나야 할 자리에서 피지 않는 꽃이다. 진창에서 피어난 꽃은 꽃이 아니라고 한다면 꽃은 새롭게 쓰여야 하겠다. 폭력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존재의 고독을 온몸으로 끌어낸 것을 ‘피어나는’ 행위라 일컬음은 어떨까. 혹은 모든 숨 쉬는 것들에 대한,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연민’을 ‘피어나는’ 행위라 부름은 어떨까.
그러한 진창 속에서도 그가 “시란 제일로 모질어야지”(「하늘을 보렴」)하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에게 ‘시쓰기’의 행위는 운명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은 아닐지. “한 발씩 움직여보면서 그 몸짓으로 간신히 자신이 어디쯤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지” 묻는 그의 행보는 틀림없이 ‘나’ 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흔적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