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수묵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낸 한국화단의 거장 김호석 화백. 그는 한국 전통미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그 가치를 구현했으며, 우리 미술의 정통성 확보와 리얼리즘의 한국적 발현에 높이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책 『옷자락의 그림자까지 그림자에 스민 숨결까지』는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형수가 그동안 “김호석 화백의 그림자가 되어 해가 뜨는 곳 지는 곳 가리지 않고” 붙어다니며 쓴 김호석의 전시회 관전기(觀展記)를 묶은 것이다. 저자는 1991년 홍대 미대생들이 준비한 강연회에서 김호석을 처음 만난 이후 그와 깊은 예술적 교감과 우정을 나누어왔다. 이 책은 그 훈훈한 시간의 결과물로서, 각각 펜과 붓을 들고 시대의 고뇌와 민중의 정신을 그려온 두 예술인이 치열하게 이어온 소통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네 번의 전시회,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
김호석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김호석전’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1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저자는 그중 2006년, 1998년, 1996년, 1993년 네 차례의 전시회 관전기를 각각 ‘야생의 기억’ ‘드러내는 미학과 숨기는 미학’ ‘먹빛에 어른거리는 역사의 먼 곳’ ‘옷자락의 그림자까지 그림자에 스민 숨결까지’라 이름 붙여 갈무리했다. 그리고 미처 관전기를 남기지 못한 ‘함께 가는 길’(1998)과 ‘열아홉 번의 농담’ 展(2002)은 ‘아직 못다 한 이야기’라는 이름 아래 선별한 작품들로 책 뒤쪽에 화보를 꾸며 대신했다. 1979년 “종래의 동양화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도전적인 데뷔작 <아파트>를 내놓았을 때”부터 그 이름만으로 한국 수묵화의 정체성을 대변하게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호석의 작품세계를 통시적으로 정리하는 동시에 각 시기별 작품군의 특징을 공시적으로 들여다보는 의미 있는 구성이다.
동명의 화집(문학동네, 2006)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2006년 展(‘문명에 활을 겨누다’)을 저자는 “초원의 대서사시에 대한 천착”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의해낸다. 광활한 유라시아 초원이 내뿜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김호석은 이 전시를 통해 마흔여덟 번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탐험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모든 존재의 생멸(生滅)의 질서와 유목민의 일상, 그리고 자연의 대재앙을 숨 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1998년 展(‘그날의 화엄’)의 관전기에서 저자는 김호석을 대가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점을 읽어낸다. 그것은 인간의 움직임을 통해 내면을 읽어내는 통찰력이다. “ 장면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레이션이 깔리고 대사가 드리워져 있는, 그래서 이야깃거리가 한 보따리씩은 되는… 이 치밀한 디테일의 힘은 관전자를 압도”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전시의 백미는 김호석 수묵세계의 진경 가운데 하나라 할 <그날의 화엄>이다. 성철 스님의 다비식 풍경을 그린 이 대작 앞에서 저자는 “한 개의 죽음과 일만 개의 삶을 그려 일만 개의 죽음과 한 개의 삶을 표현하려고” 한 화가의 결의를 감지해낸다.
1996년 展은 전통시대 지성들의 미덕을 숭상하고 외세의 유행사조에 휘둘리지 않는 김호석 예술세계의 꼿꼿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안창호, 문익환, 김수환, 홍범도, 윤이상, 신채호, 김남주 등 근현대 인물의 초상화, 그리고 <민주운동사 4ㆍ19> <무장투쟁기> 등의 역사기록화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는 김호석의 날카로운 역사의식을 화가의 개인사를 전거로 하여 고스란히 복원해내며, 이 전시가 예술사적으로는 “1990년대적 전신사조의 구현”, 정신사적적으로는 “미술을 통한 전환기적 시대정신의 정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1993년 展 관전기는 저자와 김호석이 뜨겁게 공유하는 시대정신의 회고와 추억담을 담고 있다. 이 전시회의 작품들은 “강인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정치현실” “옷자락 밑의 그림자까지, 그 그림자 속에 고인 숨결까지 담아내는 사람에 대한 탐구” “권태로워 보이던 것을 역동적으로 되살려 보여주는 동물이 있는 풍경”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저자는 정치현실을 담아낸, 이를테면 단원의 <수원능행도> 중 <환어행렬도>의 형식을 빌려 1991년 명지대 강경대군의 장례 행렬을 그린 <역사의 행렬Ⅰ―죽음을 넘어 민주의 바다로>를 비롯해 <역사의 행렬Ⅱ―시대의 어둠을 뚫고> <민주 진료대> <노동자> 등으로부터 받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한 이 나라 민중들을 그린 그림들에서는 마치 “육친적 정이 흐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만일 내게 김호석의 가장 큰 미덕이 무엇인가를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세상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들 것이다. 적어도 그의 화폭에 그려진 인간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느낌이라는 것은, 그가 인물들을 거의 육친적인 애정을 가지고 대했으리라는 것이다.”
조선의 종이, 조선의 색채, 조선의 마음
그 자신 시인이기도 한 저자는 젊은 시절의 김호석을 일컬어 거리낌 없이 “조선종이 위의 시인”이라 부르고 있다. 펜 든 이가 붓 든 이를 오히려 ‘시인’이라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조선종이 위에서 김호석은 분명 시인이다. 조선의 미(美)…… 저자가 김호석의 그림, 아니 시를 좇고 매번 꼼꼼한 관전기를 남기면서까지 그토록 붙들고자 했던 것은 바로 김호석이라는 한 인간에 스민 숨결, 즉 조선의 색채와 조선의 마음이었다. 김호석은 곧 조선이었다. 김호석은 저자보다 두 살이 많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시야가 넓고 식견이 깊으며 하도 부지런해서 층하가 크다”고 한다. 저자의 따뜻하고 겸손한 고백은 또다시 그 넓고 깊은 조선종이 위의 시인에게 가 닿고 있다.
▷ 2008년 6월 24일 발행
▷ 978-89-546-0589-2 03600
▷ 153*210 | 224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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