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홍콩영화는 쇠락하고,
세운상가는 철거됐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그의 산문을 다시 들추어볼 때이다.
이소룡의 쌍절곤부터 압구정 오렌지족까지,
유하가 관통해온 우리 시대의 초상
1990년대 문단을 대표했던 시인이자,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말죽거리 잔혹사>(2004), <비열한 거리>(2006), <쌍화점>(2008), <하울링>(2012) 등을 연출하며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영화감독 유하의 첫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1995)가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는 시의성이 강한 당대 대중문화 비평 관련 글들을 일부 들어내고, 작가가 산문집 출간 이후에 여러 지면을 통해 간간이 발표했던 시와 음악, 일상에 관한 글들을 덧붙여 3분의 1 정도 분량을 새롭게 구성했다.
유하는 개정판 서문에서,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제대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를 쓸 것이며, 제대로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들 것이다”라고 했던 첫 다짐을 다시 인용하며 "지난 십 년 동안은 글을 쓰지 못하고 영화만을 만들면서 살아왔다. 제대로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들 거라는 바람이 이제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은 아직 내 안에 살고 있다"고 밝힌다.
1963년생인 유하는 이 책에서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70~80년대에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내며 형성된 자의식을 가지고, 90년대 "대중문화 시대의 한복판을 어정쩡한 자세로 걸어가고 있는 자의 내면풍경과 그것의 아련한 무늬로서의 추억"을 담고 있다. 1부에서는 시네키드이자 키치 중독자로 동시상영관과 세운상가를 누비던 유년과 학창 시절의 추억담과 고향 및 가족, 첫사랑에 대한 기억에 관한 글들을 묶었고, 2부에서는 90년대에 시인으로서 그리고 갓 데뷔한 영화감독으로서 써내려간 일상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단상들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3부는 영화작품 단평들과 재즈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이 돋보이는 음악에 관한 글들을 엮었다.
자신을 키치 소비자라고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유하의 글은 명랑만화와 무협소설, 할리우드 영화와 포르노물을 아우르며 복제 기술이 낳은 거칠고 소비성 강한 예술들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 선생이 그의 시를 평하며 "예술비평에서 키치적인 것이라는 말로 흔히 통용되는 범주의 것들을 소비하는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반성하는 것이 그의 시가 연 새 지평이다"라고 했던 말은 그의 산문에도 고스란히 겹쳐볼 수 있다.
유하가 ´이소룡 세대´라 명명했던 초판 출간 당시의 삼십대는 어느덧 쉰 언저리에 이르렀다. 그가 열광했던 홍콩영화는 80~90년대 반짝 전성기를 누리다 이후 급격하게 힘을 잃었고, 학창 시절 누볐던 세운상가는 2008년 구도심 재개발의 명목하에 단계적으로 철거에 들어갔다. 한편 여전한 것도 있다. 그가 줄곧 반성적으로 고찰했던 아찔한 삶의 속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브레이크 없이 가속페달만을 밟아왔다. 유하에게 ´추억´이란 과거의 낡은 기억이 아니라, ´미래보다 새로운 것´이다. "담는 자의 마음의 모양에 따라 수시로 변화되는 액체성의 풍경"이며, "현재를 다양한 모습으로 비춰볼 수 있는 살아 있는 거울”이다. 따라서 “추억한다는 건 마음에 새겨진 삶의 무늬를 어루만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흘러가는 자신의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흘러간 과거를 추억함과 동시에, 과거로부터 얼마나 떠내려와 어느 위치에 이르렀는지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새로운 감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데, 난 자꾸 멈칫멈칫 뒤돌아본다. 몸과 마음은 생의 난바다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떠밀려가고, 내가 걸어온 길의 형체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그 지워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영원히 내 삶의 처음들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 그 되돌아갈 수 없음의 절망이, 나를 추억케 한다. 지워진 길들은 추억의 육체를 빌려 자신의 존재를 복원한다. 추억만이 유일하게 되돌아감을 허용한다. 추억 속에는 아직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설렘들과 첫 햇살의 환희 같은 것들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마음의 손을 뻗어 그것들을 완강하게 붙잡음으로써, 잠시 생의 난바다로 떠밀려가는 속도를 늦춘다. 하여, 그 늦춰진 속도만큼 내가 머물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넓이는 확장된다. 말하자면 추억한다는 것은 덧없이 사라질 이 순간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일이다. 난 확장된 이 순간의 넓이 속에서, 살아 있음의 현재를 더 오래 음미한다." _「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중에서
"한 시절이 남긴 유한성의 절실함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삶에 리듬을 달아주던 비일상적인 움직임들, 마음에 멜로디를 깃들게 하던 온갖 이미지의 음표들, 한때의 인상적인 영상들이 적재된 모든 기호의 화석들 따위가 모두 유행가인 것이다.
기억의 창고를 열고 먼지 낀 유행가들을 하나둘 꺼내본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나의 내부 한편에서 물음을 던져보지만, 그러나 그 무의미성마저도 완벽하게 삼켜버리는 그리움이 있다. 난 그 유행가의 몸을 타고 내 살아온 날의 한때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아침의 풍경들에 대하여, 지금 이야기하려 한다." _「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중에서
오늘의 영화감독 유하가 있기까지,
시네키드, 초보 감독 시절 일화들
여섯 권의 시집을 발표하고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인이지만, 지금의 20~30대 초중반 독자들에게 ´유하´라는 이름은 영화감독으로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영화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감독 유하가 있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주제와 문제의식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스크린에 매혹된 시네키드로 관람료 대신 받던 보리쌀을 퍼들고 동네 공터의 영화 상영장을 쫓아다니고 동시상영관의 어둠을 탐닉하던 시절부터,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순간과 첫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개봉날 풍경, 그리고 이후의 고민들까지 책 곳곳에서 그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이라는 이중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치열하게 생각의 돌파구를 찾아가는 과정 또한 엿볼 수 있다.
"실은 어릴 적 담임선생이 장래희망을 물을 때에도 거리낌 없이 ‘영화감독이요’라고 대답해 장래의 대통령과 장군, 검사 들을 한바탕 웃기곤 했다. 그땐 정말 할리우드 거장 세실 B. 데밀처럼 거대한 세트장에서 메가폰을 들고 앤 백스터나 수전 헤이워드 같은 여배우들을 떡 주무르듯 다루면서 그랜드하게 ‘레디-고!’를 외치는 망상에 젖곤 했었다." _「보리쌀로 세운 시네마 천국」 중에서
"1993년 1월 어느 날 아침, 나는 종로 3가의 한 극장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은 떨렸고 마음은 한없이 착잡했다. <보디가드>와 <나 홀로 집에 2> 매표소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서 있는 사람들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표정. 소위 ‘영화관의 정황’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들은 잠시 후면 조금은 설레는 가슴으로 표를 살 것이고, 그다음엔 적당한 군것질거리를 살 테고, 영화에 대한 즐거운 기대감을 살짝 감춘 채 상영 직전 약간의 시간을 이용해 애인 혹은 친구와 가벼운 농담들을 주고받은 뒤, 꿈꾸는 듯한 눈동자를 데리고 관능적인 객석의 어둠 속으로 잠길 것이다. 난 그 ‘영화관의 정황’ 밖에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그들이 늘어선 자리와는 대조를 이루는 한산한 매표소 앞이었고, 그 위엔 내가 만든 영화의 제목이 붙어 있었다." _「영화관에서 시간 죽이기?」 중에서
"영상언어와 문자언어 중 어떤 것이 우월한가, 어떤 것이 열려 있는가 또는 닫혀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논의의 오류가 아닌가 싶다. 표현 방식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언어를 놓고 하나의 잣대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이야기이다. 예컨대 시 속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것이 존재하고, 마찬가지 영화 속에서도 시보다 더 시적인 것이 존재한다. 나는 이 두 장르의 언어를 열림과 닫힘이라는 이분법적 개념보다는 상보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다." _「단편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