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레드, 블루, 블랙, 그린, 옐로, 화이트를 투과한
30점의 회화 감상 매뉴얼 30선
『너랑 나랑 노랑』
1.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암중모색暗中摸色
시인 오은은 스무 살에 『현대시』로 데뷔하여 이제 꽉 찬 데뷔 십 주년을 맞았다. 이 기발하고 전복적이며 맹랑한 젊은 시인은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란 첫 시집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그 시집은 한국 문학뿐 아니라 현대 문명 전체를 저글링하듯 가지고 놀았다.사람들은 모두 그가 다음에 뭘 할지 궁금해했다. 놀라운 투시 능력자, 다국적 운율을 가지고 노는 래퍼, 그래픽 티셔츠를 입은 전략가의 넥스트 무브. 그 대답과 결과가 이 책이다. 미술 산문집이라니, 게다가 주제가 색이라니.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아니라, 암중모색(色)이다. 색이란 주제 참 자주 쓰여왔고, 그림을 통해 색에 가까이 가려 한 시도들도 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심플한 인터페이스와 직관적인 디자인이 화두인 요즘, 이렇게 직관적으로 색에 접근한 책은 없었다. 지식이 끼어들고 역사가 끼어들었으며, 색보다 선이, 선보다 더 꼬불꼬불한 것들이 앞서 결국 복잡해져버리지 않았던가. 오은은 다르다. 비슷한 걸 쓰려 했다면 아마 쓰지도 않았을 거다. 시인이 레드의 정열에 사로잡히고 블루의 안락에 빠졌다가도 블랙의 절대성에 무릎 꿇으며, 옐로의 천진난만함에 한없이 밝아지고 그린의 싱그러움에 도취되었다가 종래에는 화이트의 결정타를 맞고 쓰러지는 그 총천연색의 현장이 여기 있다.
2. 카드뮴옐로와 니코틴옐로는 얼마나 가까운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와 네이비블루는 얼마나 또 먼가, 하고 오은이 묻는다. 그가 보는 색과 당신이 보는 색이 완전히 같을 수 없음이, 그 어쩔 수 없는 어긋남이 시인을 슬프게 한다. 그 슬픔이 시인 궁극의 무기를 들게 했다. 언어. 그냥 언어가 아니라 오은의 확산하는 언어. 오은은 한국어만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다. 영어도 쓰고 한문도 쓰고 아마 언어를 하나 새로 배울 때마다 그 나라 말로 말장난을 할 거다. 스페인어의 더블 R을 끝없이 굴릴지도 모른다. 그의 즐겁고 탄력 있는 언어 유희가 그림과 그림 사이, 색과 색 사이, 죽은 화가와 산 우리들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타일 사이를 반투명하게 마감하는 실리콘같이.
레드 카펫red carpet은 누구나 한 번쯤 서고 싶어하는 공간이고, 공휴일은 달력 위에서 레드 레터red letter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17쪽)
레드는 고도로 고고하고 도도하다.(20쪽)
맥도널드의 맥이 빠지고 코카콜라의 코가 납작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55쪽)
왜 정기(精氣)를 푸르다고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97쪽)
화이트는 여리고 세심해요white-glove. 화이트는 그녀들의 꿈을 이해해요. 화이트는 백설탕white sugar의 단맛처럼 쉽게 거부할 수 없어요. (중략) 이렇듯 화이트는 백혈구white cell처럼 몸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져요. 잠자리에 들며 그녀들은 또다시 화이트를 떠올리지요. 화이트는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처럼 근사하고 당연한 무엇이 돼요. 따라서 이 밤은 잠 못 드는 밤white night이 되고 그녀들은 공정한 판단white light을 내리기 위해 고민하며 한숨을 내쉬어요.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휴전기white flag를 펄럭거리며 저 멀리 하얀 별똥별이 떨어져요.(126-127쪽)
베이킹 파우더를 잔뜩 뿌린 밀가루 반죽처럼, 모든 것들이 부풀어오르고 있잖니. 노란 흙(土), 노란 십자가(十), 노란 전봇대(丨), 노란 안테나(干), 노란 사다리(目). 우리가 보고 느끼는 온갖 뿌리들이 자라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니? 이제 노란 발판들 중 하나를 고르자. 그 위에 서서 서로 마주 바라보자. 노란 이불을 덮고 있던 병아리가 갑자기 고개를 내밀듯, 천진하게 웃자. 느껴지니? 네 눈에 방금 노란 눈물이 맺혔어.(197쪽)
그러나 오은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 2012년 서울을 살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지만, 그 너머에는 화가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메리 커셋은 정말 푸른 소파에 앉은 소녀처럼 입술을 움직이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지 않을 때 고흐는 조용히 독백한다. 호안 미로는 어느새 시가 되며, 그 스스로가 시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화가임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인터뷰가 되고 희곡이 된다. 우리는 잠깐 희미해졌다가 어느새 키르히너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의 드레스덴 거리에 있으며, 위트릴로와 함께 파리를 걷고, 모네와 함께 수련(垂蓮)을 바라보며 색을 수련(修練)한다.
3. 이상해 요상해 괴상해, 그러나 아름다워
운문과 산문 사이, 문학과 미술 사이를 지그재그로 누비다보니 문득 이 책이 그 너머의 어떤 것을 말하고 있지 않나 한다. 오은은 본인답지 않게 “세련을 제련하는 법을 모릅니다”(317쪽) 하고 겸손한 척을 했지만, 이 책은 아주 세련되게 그림 너머 색 너머를 가리키고 있다. 누구나 아는 그림을 전혀 새롭게 보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을 쉽게 이야기한다. 시적으로 다가가 가벼이 떠올랐다가 화가들의 육성이 담긴 팩트 자료로 가볍지 않은 마침표를 찍는다. 실눈을 뜨거나 동그랗게 뜨거나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 어느새 시각 정보를 넘어 공감각적 정보들이 우리의 뇌를, 심장을 두드린다.
옐로는 천천히slow 흘러요flow. 때문에 옐로의 세계에서는 당신에게 가닿기까지, 당신과 피상적인shallow 관계를 청산하기까지, 마침내 당신의 애인fellow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요. 옐로의 세계에서 사랑을 구하다 사람들은 곧 공허해지고hollow 찢어진 나비 날개처럼 바람에 흩날리다가blow 좌절하기도 해요. 그러나 인내를 발휘한 자들은 찢어진 날개를 따라follow 허공을 헤치고 소용돌이billow를 넘어 앞으로 나아간답니다plow. 당신과 한 베개pillow에 누워 달콤한mellow 말을 나누는 상상을 하면 몸이 달아올라glow 침을 삼킬swallow 수밖에 없어요. 그리하여 마침내 버드나무willow 가지에 걸린 상처 입은 당신you을 붙잡는 순간, 비로소 그 자신만의 옐로Yellow가 태어나지요. 당신은 방금,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알파벳 Y를 다시 발견한 거예요.
이번엔 색이, 미술이 주제였지만 결국 오은이 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에 대해 모두가 말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문득 내일을 불러오는 게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브 탕기의 입을 빌려 말했듯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일의 우리는 어떤 감각도 예전처럼 감각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수용체는 유전적인 형질에서 벗어나 아주 다른 무엇이 되어 있을 것이다. “발광 다이오드처럼 발광(發狂)”(49쪽)하는 오은의 추종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오은은 위험하다. 샤갈의 목소리로 “상상만으로 불을 지를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하지 않을까” 도발하는 그는, 마티스의 빨강처럼 자극적이고, 마그리트 풍의 블루였다가, 시슬레의 설경처럼 희고, 르동의 베아트리체처럼 황금색이며, 보초니의 녹색 숲처럼 달린다.
책 속에서
블루는 흘러요. 블루는 멈춰 있어도 흐르는 것처럼 보여요. 정지된 상태에서도 파닥거릴 수 있지요. 날개를 지닌 블루는 언제나 꿈을 꿔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지요. 따라서 블루는 오션ocean이 되기도 하고 프린트print가 되기도 하고 때때로 문moon이 되기도 해요. 어떤 영화감독은 블루를 가지고 벨벳velvet을 만들었고 뮤지션들은 블루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blues을 연주했지요. 블루는 월요일monday과 결합해서 사람들에게 피로를 안겨다주기도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여전히 우량주blue chip로 각광받지요. 블루는 우울할 때도 있지만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아요. 약간 괴팍한 구석도 있지만 사람들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바로 블루예요. 블루는 흐르고 흘러, 그 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스스로 넘실거릴 수 있게끔 도와주지요. 그 순간을 블루는 ‘푸름blueness’이라고 부른답니다.(72-73쪽)
너는 분명히 있지만 아무 데에도 없었다. 너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내게 남은 건 너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나는 그 기억을 더듬어 여기까지 찾아왔다. 나는 너의 눈을 사랑한다. 너의 코를, 너의 입을, 너의 팔다리를, 너의 가슴을, 너의 머리를, 너의 머리카락을, 너의 심장과 신장을, 너의 폐와 쓸개를, 노란 피가 흐르는 너의 혈관과 더 노란 림프액이 흐르는 너의 조직을, 너의 랑게르한스섬을, 너의 눈물샘과 코점막을, 거기서 분비되는 너의 눈물과 너의 콧물을 사랑한다. 너의 지문과 너의 장문을 사랑한다. 나는 너의 전부를 사랑한다. 나에게 너는 백 퍼센트 여인이다. 나는 너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다.(186-187쪽)
작가의 말
여기에 실린 서른 점의 작품들은 하나의 색채가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물론 대상이 된 화가들 중 대다수는 우리가 흔히 ‘색채 화가’라고 부르는 이들이 아니다. 색채 화가로 그 대상을 한정했다면, 나는 아마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개중 어떤 화가들은 형태나 상징, 기법 등 다른 잣대를 들이댔을 경우에 더욱 빛이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고집을 부려 오직 색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림들을 오해하고 오독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껏 느끼고 상상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색으로 떠나는 모험이 비로소 흥미진진해진 것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직접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되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관찰자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고 느꼈던 여러 가지 소회를 시로 옮겨 적기도 하고 편지의 형태로 화가에게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레시피를 만들고 화가와 가상의 인터뷰를 하고 그림 속 인물이 되어 모놀로그를 써보기도 했다. 이것은 분명 행복한 경험이었다.
내가 맨 처음 다룬 작품은 뭉크의 <키스>였고, 내가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작품은 클림트의 <키스>였다. 키스에서 시작해서 키스로 끝난 셈이다. 서른 점의 작품을 마주할 때 나는 그야말로 키스하는 심정이었다. 정확히 말해 키스하기 직전의 심정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어떤 키스는 절박했고 어떤 키스는 짭조름했으며 또 어떤 키스는 황홀하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어렵사리 서른 번의 키스를 하고 나니, 입술은 다 헐고 궁색만이 남게 되었다. 가만히 더듬어보면 지금도 그 직전들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키스의 숨결이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가닿기를 바란다.
추천의 말
이 책을 사실 때 주의할 점:
1. 물론 이 책은 색과 빛과 그림과 사랑에 대한 책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2. 만일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아주 위험한 일을 한 겁니다. 왜냐구요?
3. 이 책에는 폭발물질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4. 그 폭발물질이 당신의 감성과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열망과 결합할 때,
5. 그때 일어날 불꽃 축제에 관하여 이 책을 지은 오은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치열하게 웃고 울다가 드디어 쓸쓸해진 죄밖에는.
6. 당신에게도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다만 오래 이런 책을 보고 싶어한 당신의 기다림에 책임이 있다면 있을 뿐. _허수경(시인)
이미지에 드리운 편견을 언어가 해결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서른 점의 그림을 멋대로 분류하고 자신의 언어로 마구 휘젓고 다니는 이 책을 나는 ‘회화 감상 매뉴얼-근미래 버전’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역시 근미래인 만큼 구식 매뉴얼과는 다르다. 매뉴얼 안에 적힌 건 설명문이 아니라 예문이다. 미술관에서 늘 패배했던 나는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보고 고무되었다. 돌아오는 마감이 끝나면 시립미술관에 가야겠다. _정우열(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방금 책을 덮은 독자로서 확신컨대 오은이 책상 앞에서 감당한 과정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로도 감당하기 힘든 미로인 동시에 황홀경이었을 것이다. 레드, 블루, 화이트, 옐로, 그린, 블랙에 관해 오은은 창의적으로 ‘오독’하고 즐거운 ‘말장난’을 무지개 형상으로 펼친다. 여섯 빛깔을 하나로 꿰는 실은 운율이다. 『너랑 나랑 노랑』은 기사, 일기, 편집, 희곡의 온갖 겉옷을 입고 있지만 끝내는 행갈이를 하지 않은 시집처럼 읽힌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는 내내 표제 음악을 듣는 기분에 젖었고 세 페이지 걸러 한 번꼴로 누군가 이 문장들에 가락을 붙여 노래로 불러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_김혜리(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