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관객 사이,
국내 유일의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 윤수정
저자 윤수정은 국내 유일의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다. ‘국내 유일’이라는 단어에 일단 방점을 좀 찍어두고 싶다. ‘유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본론을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말 그대로 영화 포스터에 들어가는 카피를 주로 쓴다. 그리고 홍보용 보도자료를 쓰기도 하고 광고를 짜거나 네이밍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영화 마케팅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 그녀는 요새 소위 잘나가는 ‘크리에이티브’ 강사이기도 하다.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진행하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테라피> 강의는 매 회 매진을 기록하며 인기몰이 중인 데다가, 수업 내용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한 줄로 사랑했다>에서는 막연히 화려할 것만 같은 영화계 뒤편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카피라이팅의 진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필자가 카피라이터로 근 20년 가까이 지내오면서 맡았던 영화들과 한 줄의 카피를 위해 무수히 많은 시간 끄적였던 습작들, 그 과정에서 떠오른 단상, 만난 영화계 사람들 등…… 다양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또한, 그녀의 크리에이티브 원천이 무엇인지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으며, 각각의 글마다 붙여둔 소제목은 실제로 채택되어 사용했던 카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의 노트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와 ‘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 친숙한 이 두 개의 카피는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인기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녀는 스스로, <워낭소리>는 가장 최근작도 아니고, 카피를 쓴 영화 중에 더 많은 관객을 들인 영화들도 있지만, 기꺼이 이 영화가 본인 이력의 간판이 되는 데 동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만큼 이 영화의 묵직한 감동을, 말 그대로 ‘잘 쓰인 카피’를 통해 관객과 함께 느꼈다.
‘고맙다’라고 썼다.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그렇게 울려퍼지는 소의 워낭소리. 그것은 할아버지가 소를 부르며 나지막이 건네는 이별의 송가이기도 하고 소가 할아버지에게 화답하는 메아리이기도 하다. 그 소리가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워낭에서 화수분처럼 퐁퐁 솟아 올라 포스터를 보는 모두의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기를 그리고 겨울을 녹이는 봄물이 되어 계속 달려가기를…… 바랬다. 그래서 흘리듯, 써본 카피가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였다.
_ 본문 129쪽 중에서
그 카피들에는 삶의 경험치와 기억이 운명적으로 따라다녔다. 영화 <스승의 은혜> 작업 때에는 유년시절 상식 밖의 행동으로 가슴에 멍을 안긴 어느 선생님을 겹쳐 떠올리며 ‘선생님 그때 왜 그러셨어요’를 썼고, <오! 브라더스> 작업 때에는 동생들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했던 맏이로서의 삶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유머와 운율감을 더해 ‘형, 어디가. 너, 버리러!’를 탄생시켰다. ‘무뇌증’으로 하루밖에 살 수 없는 아이를 기꺼이 낳고 태어나자마자 출생신고를 하는 부부의 가슴 찡한 이야기 <하루>를 맡았을 때는 저자의 아버지 비석에 새기고자 마음에 품고 있던 문장 ‘너무 눈부셔 짧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를 꺼내놓았던 그녀다.
물론, 일을 하다보면 태생적으로 동감할 수 없는 영화의 카피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체의 재미와 완성도를 떠나 액션영화라는 장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저자에게 <바람의 파이터>가 대표적인 그런 경우였다. 보통의 남자들은 만나면 PC방이나 술집으로 향하느라 아예 극장에는 가지 않았고, 여자끼리 보기에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묵직했고, 커플의 경우에도 대개 여자가 주도권을 갖고 영화를 선택하는 형편이다보니, 더욱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 바로 주목했다. 양동근이라는 잘생기진 않았지만 친근하고 편안한 배우가 인간미 넘치는 연기로 표현해낸 최배달이라는 사람의 일생 이야기로 초점을 맞춰가는 과정 끝에 ‘한국인으로 태어나 조센진으로 살았던 파이터로 기억될 이름’이라는 명카피를 써냈다. 그 결과, 여자들이 앞장섰건 남자들이 용기를 냈건, 그들은 극장으로 움직였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애국심을 듬뿍 품고서.
필름 속에는 양동근의 짤막한 팔다리와 남루한 누더기가 보이고 그가 일본 배우들과 합을 이루는 액션이 보인다. 그러나 내 눈에는 단단하고 다부진 옛 남자가 한국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고, 살아남고 싶다고, 스스로의 극한을 보고 싶다고 달려드는 눈빛이 보인다. 그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정통 무술인도 아니지만 그의 근육에 감추어진 혈관은 사람, 조국, 그리움, 버려짐, 울분, 분노, 그리고 생존으로 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 근육에 감추어진 혈관의 성분을 카피로 쓰기로 결심했다.
_ 본문 68쪽 중에서
그밖에도, 영화 네이밍 스토리 및 보도자료와 같이 분량이 긴 작업물들도 몇 가지 추려 함께 수록했다. 또한, 영화계에 발 담그기 전에 광고대행사에서 맡았던 상품 광고 카피 ‘한입의 행복’과 하이 서울 페스티벌의 메인 카피 ‘궁, 봄에 피다’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아쉬운 마음에 책에 실었다.
영화를, 관객을, 세상을 끌어안는,
단 한 줄의 메시지
얼마 전, 가습기 세정제가 원인이 되었던 신종 폐질환으로 임신부와 아이를 비롯, 많은 생명을 잃은 비극이 있었다. 그 세정제 병에는 ‘100% 자연성분, 아기에게도 안전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 역시 어떤 카피라이터가 썼을 것이고, 그래서 팔렸을 것이다. 잘 쓴 카피에 사람이 죽었다.
죽음으로 몰고가는 예가 아니더라도 광고가 ‘미필적 고의의 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많다. 거짓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홀려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와 고액대출 계약을 맺게 한다. 광고라는 빌딩 숲은 성형미녀, 외제차, 발레파킹과 어울리지만 숲 너머 달동네의 작은 집 같은 영화 광고는 바람도 통하고 볕도 든다.
_ 본문 223쪽 중에서
그래서, 카피는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영화도 생명체와 같아서 한 컷 한 컷이 살아 숨쉬고, 프레임마다 관객과 호흡한다. 잘 만들어진 썩 괜찮은 영화가 더 많은 관객과 만나게 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카피의 시작이 되었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그 선한 욕심이 마음속에서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관객들의 가슴팍 정중앙에 꽂혀 오래오래 여운을 남겼을 것이다. 아프게든, 즐겁게든, 소름이 끼치게든.
윤수정 카피라이터는, 그렇게 가습기 대신 방 안에 걸어둔 젖은 빨래처럼 소박하지만 묵묵히 그렇게 ‘한 줄’의 카피로 세상을 껴안고 사랑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