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초의 나로부터 도주하고 있다”
왜곡과 보편화를 낳는 언어를 부정한다
차이를 향한 탈주의 시학이 시작되었다!
“이름의 억압으로 시인이 되었군요”
그녀의 이름은 말선(末先). ‘끝이면서 처음’이라는 역설적인 작명은 그녀의 동의 없이 주어졌다. “항상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서서 부제처럼”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녀는 “나를 내버려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데도요”라며, 그저 자신을 “텅 비우기에 매진”할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감추기 위해”. “이름의 억압으로 시인이 되었군요”라는 그럴싸한 해석을 그녀는 “보편적 오류”라 경멸한다.(「조말선」)
시로써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시인, 조말선. 보편주의와 전체주의에 빠진 진단과 호명을 일체 거부하는 뜻이 시 안에 고스란하다. 1998년 등단해 『매우 가벼운 담론』 『둥근 발작』 두 권의 시집을 통해 ‘나’를 탐구하는 시 세계를 구축해온 그녀이다. “새롭게 열고 있는 실험적인 세계와 심도 있는 사유의 진정성”이 높이 평가되어 2012년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수상작을 표제시로 삼은 세번째 시집,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가 73편의 시를 품어 안고 세상에 나왔다.
‘차이’를 향해 달아나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적극적인 ‘탈주’의 이미지다. 그녀는 어째서 탈주를 감행했는가. “성급한 일반화”가 “눈과 코와 입이 뭉개진”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내고,(「성급한 일반화」) “천 개의 공허 천 개의 포만 천 개의 사랑 천 개의 이별”, 이 무궁무진한 “보편성” 사이에서 개별성과 고유성은 철저히 무시되기 때문이다.(「천수천안관음보살」) 그녀는 ‘차이’를 향해 달아난다. 보편과 상식, 이데올로기, 관습과 제도에 저항하려는 결심이다. 그녀는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평행선을 긋고 있는 내 삶의 형제를 내 삶은 피한다”라고 외친다.(「유사성」)
맨 처음 가계도를 그리던 날부터
나는 까마득히 도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
치를 떨 때마다
내게 매달린 잎사귀들이 새파랗게 질리고
치를 떨 때마다 나를 배반했지만
나는 미덕의 반대편을 선호했으니
그것이 내 도주로의 필수코스였으니
―「나무」 부분
그녀가 벌이는 탈주의 시학은 ‘가계도’, 즉 가족에서 시작해 모든 관계로 확장된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결국엔 그녀를 배반하는 이들. 관계를 포장하는 허위나 관계를 봉합하려 드는 폭력에 치를 떨면서 그녀는 달린다. 오해를 억압하고 차이를 용납하지 않으며 ‘나’와 ‘너’를 거리낌 없이 잇대는 “어울린다는 말”을 거부한 채.(“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네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어울린다는 말이 어울리니?”, 「어울리니?」)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다. 도주하는 이에게 “고향”은 “후줄근한 중고품/ 더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고향」)에 불과하다. 그리움과 향수를 내세워 붙박아두려 하는 ‘고향’은 도주에 장애물이 될 뿐이다. 이렇듯 그녀는 화해, 공감, 동화와 같은 “미덕의 반대편”에 선 채 “까마득히 도주하는 삶”을 추구한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해 재고함으로써 오롯한 고유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내가 함부로 쓰는 내 것이 아닌 고통”에 대하여 쓰다
내가 네 앞에 반하는 동시에
뒤까지 반하는 건 일루전이다
지금 나는 오해하기 위하여 글을 쓰고 있다
착각하기 위하여 읽어주면 좋겠다
이해받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돌아와보면
물심양면이 늘 궁색했다
―「물심양면」 부분
조말선의 시 세계에서 교감과 소통은 전제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구모룡이 이번 시집 해설에서 언급한바, “이는 모더니스트의 언어 회의주의와 다르다.” 그녀는 “언어로 된 성채를 짓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 그녀는 언어가 우리 사유의 근거이지만 또한 무질서와 왜곡의 원천임을 잘 알고 있다.”
찢어지는 고통은 고통인가 쾌락인가 환희인가
찢어지는 고통의 기억은 능지처참의 기억인가
(……)
이 대담한 수식어는 나에게 경험적인가
이 끔찍한 수식어는 나에게 선험적인가
이렇게 무모하게 사용할 만큼
나는 끔찍한 지경이 이르렀던가
(……)
찢어진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찢어지는 고통은 내가 함부로 쓰는 내 것이 아닌 고통
―「찢어지는 고통」 부분
쉽게 쓰이는 언어들, 상투화된 표현들, 그녀는 이에 대한 질문을 부단히 던지며 의식의 쇄신을 꾀한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찾”으려면 “수식어를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손에서 발까지 걸어갔어요”
그리하여 조말선은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대상’이 아닌 ‘장소’로 삼는다. 그것은 ‘찾아갈 곳’이자 ‘도착할 곳’이 된다. ‘멀거나 가까운 곳’일 터이다.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배에서 등까지 걸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삽시간에 와락 안을 수도 있지만/ 그다음엔 무얼 하죠?”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장소이되 움직이는 장소라서 “당신에게서 당신까지 매일 한 시간 십 분씩만 걸어”가게 될 수도 있다.(「손에서 발까지」)
우리는 이렇듯 그녀의 시 곳곳에서 해석의 권위에 굴하지 않으려는 투철함, “허위적 언어, 얼굴이 사라진, 내가 사라진, 관계의 진실이 사라진 언어의 세계를 찢고 나가”(구모룡, 해설)려는 태도를 감지할 수 있다. 그녀가 택한 사유의 과정은 비록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그로써 새로운 언어,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려는 노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름의 억압”으로 시인이 된 것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사유를 거듭하는 타고난 시인 조말선, 그녀가 탄생시킨 유일무이한 ‘재스민 향기’가 멀리 퍼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