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동시집 24
고양이의 탄생
이안 시 ✱ 김세현 그림
2012년 12월 12일 발행 | 978-89-546-1989-9 73810 | 8500원
동(童)과 시(詩) 사이를 흐르는 절묘한 긴장, 『고양이의 탄생』
진정성 있는 시적 탐구와 날카로운 평론으로 우리 동시 문단에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한, 시인 이안의 두 번째 동시집이 출간되었다. 첫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을 낸 지 4년 만이다. 이번 동시집은 시인 이안이 진부한 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시도한 모험의 기록이다. “‘동’이 제한하는 시의 단순성과 ‘시’가 제한하는 문학적 완성 사이에서 고투하는 가운데, 좋은 동시는 어느 순간 그 둘을 껴안으며 하나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이안의 시적 고민이, 비로소 그 반가운 부딪침의 순간을 맞이한 듯하다.
전작에서도 호흡을 맞추었던 화가 김세현은 이번 책에서 기존의 스타일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이미지 구성을 보여 준다. 강렬한 색채 대비와 긴장감 넘치는 화면 구성으로 시의 심상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언어를 나란히 펼쳐 놓은 것이다. 텍스트가 이미지 사이를 자유롭게 흐르다, 둥실 고였다, 산산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흐르는 동안, 시 속에 담긴 다양한 색깔의 감정이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
아프지만 따스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시, 「뱀」 연작
1부 ‘참기름병에서 나온 시’는 「뱀」 연작 열네 편으로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형식의 동시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울 법하다. 그러나 ‘참기름병에서나와콩기름병으로들어’가기까지, 뱀이 남긴 자취를 가만 따라가다 보면, 시인이 이몸과 저몸을 넘나들며 얻은 삶의 경험을 예민한 감각과 깊은 사유로 그려 놓은 그림이 강렬한 인상으로 떠오른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당신이 다섯 살 때 뱀에 물린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저녁 때 외할머니가 울 밖 고추밭에 가서 고추를 몇 개 따오라고 했단다. 가서 보니, 고추포기 아래 웬 검은 양말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걸 주우려는데 양말인 줄 알았던 것이 풀쩍 뛰어오르면서 손등을 물었다. 손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뱀을 어찌어찌 떨어뜨린 뒤 동네에서 돼지띠인 사람을 불러 입으로 독을 빨아내고서야 겨우 살아났다는 이야기. 어린 나는 그 이야기의 끝마다 어머니의 손등을 두 눈으로 확인하곤 그 상처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어머니 품에 안기곤 했다.”
이안이 쓴 산문의 일부다. 뱀 연작은 뱀에게 물린 어머니를 통해 느낀 시인의 상처이자 공포이며,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 낸 자전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뱀에 대한 시인의 공포는 어린 시절 들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로부터 비롯된다. 어머니의 경험 속 뱀 한 마리가 시인의 몸 안으로 들어와 오래 머물다, 마침내 빠져나온 뱀이 종이 위에 남긴 풍경. 시인 김륭은 그 시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 시들 속에는 엄마와 아빠에게 물려받은 몸이란 공간과, 드넓은 세계를 살아가는 온갖 것들의 몸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함께 얽혀든 세계가 그려져 있어요. 시인은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자신의 삶과 몸을 통해 끄집어내는 사람이지요. 뱀 연작은 이런 사실을 이안 아저씨가 마법을 부리듯 자신의 삶과 몸을 통해 확인시켜주는 시편들이에요.”
뱀 연작시의 실험성은 기존 형식이나 어법과 조금 다른 지점에서 독자를 만나고 싶은 시인의 의지를 잘 반영한다. 가벼운 재치와 아이디어, 말놀이로 점철된 주류 동시는, 이처럼 진부함을 탈피하려는 여러 시도를 발판 삼아 더욱 깊고 넓은 확장 가능성을 얻는다. 아이들의 세계에 오히려 갇히게 되는 것을 경계하며, 아이들과 함께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모험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또박또박, 맨눈으로 길을 짚어 나서는 참신한 시적 탐색
「뱀」 연작의 실험성과 함께 『고양이의 탄생』을 나란히 떠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튼튼한 기둥은 섬세하고 참신한 시인의 눈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언어와 한층 돋보이는 감각적 탐구는 흔히 보던 동시들과 다른 경지를 보여 준다.
저놈의 똥강아지 옆집 똥강아지
옥수수 울타리 빠져나와 또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코를 땅에 박고 뚤뚤 뚤뚤 똥 눌 자리 찾다가
모과나무 아래 똥 한 주먹 질러 놓고
달랑 달랑 달랑달랑 강아지 되어 돌아간다
저놈의 또강아지 옆집 또강아지
-「똥강아지 또강아지」전문
궁둥이에서 동그란 똥 두 덩이가 ‘똥똥’ 떨어지고 나니 똥강아지는 또강아지가 되었다. 유쾌하고 천진한 화자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정황들이 시인 이안의 시선을 통과해서 생생하고 즐거운 질감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온 세상 춥고 배고픈 이들은 모두 이리로 와요)
(떠돌이가 먼저예요 주정뱅이가 먼저예요)
(이리 와서 빛을 쬐고 배를 채워요)
(비렁뱅이가 먼저예요 코흘리개가 먼저예요)
(배고픈 이는 배를 채우고)
(속병 난 이는 속을 달래요)
(추운 이는 빛을 껴입고)
(엄살쟁이는 꽃가루 외투를 덧입습니다)
(서둘러요 겨울이 와요)
(따뜻하고 배부른 이들도 오셔요 오셔요)
(우리는 다 겨울 골짜기로 갑니다)
(든든히 먹고 든든히 입고)
(겨울행 기차를 기다려요)
(기차가 곧 구절초 역을 떠나 이리로 온대요)
(이리 와서 빛을 쬐고 배를 채워요)
—「들국화 기차역」 전문
길가에 핀 들국화 꽃잎 역시 시인의 눈을 거쳐 배고프고 추운 이들을 위한 안식처로 새로 태어난다. 괄호를 닮은 꽃잎 안에 외로운 생명들이 와서 깃들고, 모두 안심하며 빛을 쬐고 배를 채우는 기차역. 소복이 겹친 꽃잎은 얼마든지 많아서, 누구라도 머물며 겨울을 준비해도 될 듯하다. 넉넉하고 따사로운 시심이다.
두 번째 동시집을 내기까지 여러 날, 시인은 자신을 찾아온 괄호( )를 안고 씨름했다. 그가 마침내 ( ) 안에 모아 담은 것들은 모두, 풀숲에 남은 뱀 허물처럼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 겨울 앞 들국화 기차역에 모인 비렁뱅이, 코흘리개처럼 짐짓 몸을 숨기는 것이 익숙한 소외된 목숨들, 또는 고등학생 누나의 편지 말미처럼 감추고 싶어도 드러나고야 마는 분명한 진실 들이다.
시│이안
1967년 제천에서 태어났다. 1998년 『녹색평론』에 「성난 발자국」 외 두 편의 시를 발표하고, 1999년 『실천문학』에 「우주적 비관주의자의 몽상」 외 네 편의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과,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을 냈다.
그림│김세현
1963년 연기에서 태어났다. 그림을 그린 책으로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그림책 『만년샤쓰』 『준치 가시』 『엄마 까투리』 등이 있다. 이번 동시집에서는 특유의담백한 수묵화에 종이를 오려 구성하는 등 다양한 기법을 더해 새로운 차원의 이미지를 펼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