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
여자는 글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남자는 사진으로 사랑의 여백을 완성한다
섹스칼럼니스트 김얀이 쓰고 시인 이병률이 찍다
“13개국 낯선 침대 위에서 만난 13명의 남자 이야기를 적다보니
잔뜩 웅크리고 있는 상처투성이 내가 보였습니다.”
그동안 여행했던 도시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 도시에서 알았고 만났던 남자들이 생각나.”
서른번째 여름, 그녀는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그 어떤 것을 주체하지 못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불현듯 여행을 떠났다. ‘나의 문제’는 뭘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삼십대 초반이 된 그녀는 이제 많은 것을 결정해야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모님이 권하고 친구들이 충고하는, 모두가 똑같이 사는 평범한 삶을 살기는 싫었다.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어떤 날은 생각 없이 무작정 떠나기도 했다. 몇 번을 떠난 여행지에서 남자를 만났고 사랑을 했고 섹스를 했다. 인연은 이어지기도 했고 이어지지 않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결론은 쉽게 났다. 좋아하는 것은 책, 여행, 그리고 섹스.
결국 직장은 두 달 만에 그만둬버리고는 좁은 방의 천장을 보고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렇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가 언젠가부터는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워만 있게 되었다. 문득, 생각 없이 사는 것도 꽤 괜찮은 일 같았다.
어떻게 사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얼마나 우습나.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더 얽매이게 한다. ‘생각 없이 사는 여자’야말로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생각 없이 살다가 참외 껍질처럼 영양가 없는 남자를 만나고 염소똥 같은 얘기를 하다가 오슬오슬 추워져 서로를 껴안는 일 따위 역시 나쁘지 않다.
_ 본문 [그래도 ‘연애’라 부를 수 있는 연애들](100쪽) 중에서
그녀는 돌아와 글을 썼다. 자신이 떠난 13개국의 여행지와 13명의 남자들 이야기를. 그녀에게 사랑은 ‘밥’ 같은 것이었으며, 글쓰기는 ‘마지막 꿈’ 같은 것이었다. 늘 무언가 쓰는 일을 갈망해왔으나 도무지 한 줄도 쓸 수 없어 망설이고 또 서성거렸다. 그렇게 마음의 응어리들을 조금씩 글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편안하게 웃었다.
이 책에는 바로 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방콕에서 온몸에 문신을 그린 남자를 만난 일, 몽마르트르에서 우연히 만나 서울까지 이어졌던 인연,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알 수 없었던 의문의 남자 그리고 지금 사랑하고 있는 ‘너’까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좋아하며 침대 위에서 만났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후에 누군가 여행했던 도시에 대해 묻는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 도시에서 알았고 만났던 남자들이 생각난다”고.
숱하게 만나왔던 남자들을 통해 그녀는 결국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가벼이 스치는 인연이든 깊게 사귀는 연인이든 사랑이라는 행위가 늘 그렇듯이 묘한 설렘 뒤에 늘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동반하기도 하고 인내하고 감수해야 할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이국적인 풍경 속에 어우러지면서 우리는 모두 이런 만남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해지고 사유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살짝 벌어진 네 입술을 보며 차라리 네 연락처를 파리 길거리에서 잃어버렸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했다.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잠든 네 곁에 나도 다시 누웠다. 눈을 감고 우리가 함께 봤던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을 떠올려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발밑에 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깜깜한 공기를 삼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반짝이던 에펠탑과 차가운 밤공기와 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낮 이불 속의 너와 나. 그 암흑 같은 침묵. 이제라도 나는 너를 잃어버려야겠다. 오늘이야말로 정말 너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너와 나는 다시 서로의 이름을 모르던 여행자가 되었다.
_ 본문 [그렇게 우리는 낯설어졌다](92쪽) 중에서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이야기 어딘가에 낯선 곳을 헤매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내가 보였다”고 말한다. 이 글을 쓰며 심연의 어딘가를 서성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외면해왔던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그녀의 이 ‘야하고 이상한 여행’은 그 자체로 치유의 시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섹스칼럼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 일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 이야기도 조심스레 꺼내놓고 있는데,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비단 김얀 작가의 경우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청춘들의 공통된 고민이자 고통이다. 다들 시원하게 꺼내놓지 못하고 얼마쯤은 자신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 틈에서 김얀 작가는 작지만 단호한 용기로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과 다른 삶이라고 해서 잘못된 삶은 아닌 것이라는 것을. 자신 스스로가 충분히 행복해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빠를 죽고 싶게 만드는 딸.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하여 아빠가 나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말까지 하는 걸까. 나의 행복이 아빠에게는 왜 불행이 되는 걸까? 부모님의 권유로 적성에도 맞지 않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런 성취감 없이 일하고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적금을 들고 보험을 들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시집을 가는 것보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한데…….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참을 생각해봐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빠, 싱가포르의 멀라이언이에요. 예쁘지 않아요? 이런 풍경 앞에서 왜 그렇게 슬픈 말을 해요? 그러나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고 한없이 무거워져 나 또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_ 본문 [거짓말엔 눈이 멀어버리기 마련이다](53쪽) 중에서
낯선 여행지의 낯선 침대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한번쯤은 외로웠던 경험을 했던 독자들 또한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여행을 떠났고 수많은 당신들과 만났으며 이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한 여성의 솔직한 여행기는 이지러진 바람들이 어느 한 곳에서는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와 동시에 홀로 떠나는 여행에서도 결국 아무도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녀가 쓴 글이 그의 프레임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걸음을 따라 이야기는 한 남자의 카메라 프레임에 담긴다. 김얀 작가의 자취를 따라 이병률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다시 여행을 떠난 것이다. 기존에 출간된 자신의 여행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서도 직접 여행지에서 찍은 감각적인 사진으로 글의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렸던 그였기에, 이번 협업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여자의 솔직하고 대담한 글 위에 그 남자의 사진이 불투명한 필름처럼 한 겹 한 겹 겹쳐진다. 그가 카메라에 담아온 이 은밀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행간에 숨어 있는 이야기의 해설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더 깊은 여백을 마련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곧 두 명의 작가가 책 속에서 따로 또 같이 하는 이야기다.
★ 본문 중에서
과연 남자는 나를 어디까지를 이해해줄 수 있을지. 내 속 깊이 든 흉측한 내장까지 들어내 보여준대도 여전히 괜찮다고 할지. 항상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왜 쥐도 새도 모르게 또 사라져버리는 건지. 이렇게 시작된 사랑도 결국 나중엔 나를 베는 칼날이 되리라. 직장을 그만둘 때 이제는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에 파묻혀서 글만 쓰겠다고 했던 가족들과의 약속. 그리고 또 스스로와의 약속. 사랑은 텅 빈 상자와 같았다. 조심조심 공을 들여 포장을 뜯어보면 그 속은 늘 텅 비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또 한번 속느니, 차라리 내가 사랑을 글로 지어내는 게 확실하겠다.
_ 본문 [스물두번째 혹은 스물세번째 당신](113쪽) 중에서
오후 네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주부들은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를 걷고, 상점 앞 고양이들은 낮잠에 빠져들던 시간.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거리로 쏟아지고, 바닷가 주변의 싸구려 식당들은 장사 준비로 분주하다. 그들에게는 일상인 이것들이 나에게는 특별한 장소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일상을 보내던 서울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여행의 장소가 되었던 것이겠지.
_ 본문 [섹스와 이륙, 그 남자와 섬의 공통점](161쪽) 중에서
스물둘인 J가 환하게 피기 직전의 꽃이라면 서른 근처의 나는 이제 지는 꽃이었다. 나는 이미 많은 연애를 해왔기 때문에 이 끝이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옆에 두고 예쁘다, 예쁘다 속삭이며 물을 듬뿍 주다가도 결국 먼저 시들해져버리는 건 J가 될 것이다.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작은 희망에 나를 내던질 만큼 나는 이미 순수하지 않았다.
_ 본문 [그 도시는 전부 너였다](199쪽) 중에서
이 도시는 짙은 어둠 속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나는 어둠을 걷어내는 대신 어둠이 손짓하는 미지의 세계로 기꺼이 걸어들어갔어. 세상엔 스스로 발을 담그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나는 이 도시에 일어났고 일어날 일들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중략)
낯선 도시가 주는 그 신비한 매력에 안개를 따라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건물과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어. 이 환상의 도시에 내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최대한 꾹꾹 땅을 밟았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를 지날 때면, 불안함보다 더 큰 안도감을 느낄까? 이런 느낌 때문에 나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멈출 수가 없나봐.
_ 본문 [결국 그 사람이 보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201쪽) 중에서
차라리 사랑이 털실로 짠 목도리라면 좋겠네. 그러면 한 코 한 코 정성스레 엮어 네 목에 걸어 보여줄 텐데. 결국 차가운 날이 되어 나를 베고 가는 칼이라 해도 반짝반짝 정성들여 갈아 보여줄 텐데.
열여섯 첫 키스에서 시작한 남녀관계 이후로 나는 늘 ‘사랑이란 건 뭘까?’ 하고 고민했었어. 사랑의 시작은? 그렇다면 그 끝은? 대체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 어떻게 소멸하는 것인지. 그동안은 사랑에 무지해서 사랑을 불신해서 아니, 사랑을 두려워해서 이제껏 단 한 번도 즐기지 못했지만 이번엔 확실히 느낄 수 있어.
_ 본문 [나는 지금 이렇게 너를 사랑하고 있어](221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