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소설집
2013년, 윤대녕의 두번째 소설집을 다시 만나다
2013년 8월, 문학동네가 윤대녕의 두번째 소설집 『남쪽 계단을 보라』(1995)를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윤대녕’이라는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켰던 첫번째 소설집 『은어낚시통신』과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평단과 독자를 단숨에 그리고 오랫동안 사로잡아온 세번째 소설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를 잇는 이 소설집에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배암에 물린 자국」「신라의 푸른 길」「남쪽 계단을 보라」「가족사진첩」「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새무덤」)과 두 편의 중편소설(「지나가는 자의 초상」「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 실려 있다. 좋은 작품이 그러하듯 이 여덟 편의 소설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그것을 읽는 이들의 가슴에 파고든다. 그러니 윤대녕과 함께 세월을 통과하며 꾸준히 그의 작품을 따라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이제 막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독자들에게도 이 두번째 소설집은 특별할 것이다. 1995년의 서른네 살 윤대녕이 보여주는 그 먹먹하고도 황홀한 코발트빛에 몸과 마음을 맡겨보라.
사막을 향한 그리움으로 결국 사막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간절함 간곡함에 대하여
『남쪽 계단을 보라』에서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 예술적 기품과 장인의 엄격함을 더해가며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해온 소설가 윤대녕의 뿌리를 만나게 된다. 그 뿌리를 통해 우리는 이 소설가가 타고난 감각을 통해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포착해내고 이에 문학적으로 응전하는 한편,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독과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그려왔음을 알게 된다.
특히 2013년 지금 이 순간, 『남쪽 계단을 보라』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소설집에 작품이 발표되었던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데에 있다. 오래 잊고 지냈던 그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 말이다. 윤대녕의 이 소설들 덕분에 우리는 그리운 이를 만나려면 그를 향해 직접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간곡한 세월과 사막을 향한 그리움으로 결국 사막으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간절한 마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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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진정 너를 할퀴면서 내가 아프다 소리친 적은 없었던가. 혹은 너의 사랑을 배신이라 이마에 적어놓고 남몰래 서슬 퍼런 독을 키우며 산 것은 아니었을까. 이토록 울혈 진 마음…… 겁내하는 마음…… 그렇게 비겁한 자 되어 마침내 아침이 와도 이렇듯 포대기 속에 숨어 총칼을 껴안고 있어야 하는 마음. _「배암에 물린 자국」, 27~28쪽
밤은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내며 깊어가고 있었다. 잠시 나는 조기떼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내 품 안에서 그녀는 죽은 듯 오래오래 소리가 없었다. 저 코발트빛 어둠 속에다 대나무를 꽂고 애타게, 무슨 소리를 들으려 하고 있는 사람처럼. _「남쪽 계단을 보라」, 99쪽
“사람에겐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때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 사람이 상처 한번 받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겠어. 다행히 그것도 길들이기에 따라서는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 사람의 숨결 속에서 말이야. 과거의 자신을 애써 부인하려고 하지 마. 그때엔 그게 아마도 최선이고 진실이었을 거야.” _「가족사진첩」, 209쪽
나는 너무 지친 사람들만 만나며 살아왔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정갈하고 혼자 있어도 추해지지 않는 그런 사람 곁에 있고 싶다. 나는 너무 상처받은 사람들만 만나왔다. 아니 상처받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들하고만 술을 마셔왔다. 하지만 상처란 눈에 보이는 그런 게 아닐 것이다. 그건 상처라고 기억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 저 깊은 곳에 숨어 살며 소리없이 영혼을 갉아대고 있는 어떤 짐승의 그림자 같은 것일 게다. _「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247쪽
“사막에 백합꽃들이 피고 있어요. 마침내 무도가 시작되려나봐요.”
사막에 피고 있는 백합. 백합이 피고 있는 사막.
나는 눈을 지그시 뜨고 창밖 어둠 속에 눈을 주었다.
눈이 내리고 있는 밤의 사막. 무도가 시작되고 있는 사막. _「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333쪽
이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소설과 두 편의 중편소설은 1994년 봄부터 1995년 봄까지 집중적으로 썼다. (……) 나는 이 시기에 그 화염 같은 열기 속에서 작가로서의 내 운명을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후 주기적으로 슬럼프가 찾아왔지만, 지금껏 버텨온 것은 그 ‘화염’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것이 구심력으로 작용해 내가 소설의 바깥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한사코 붙들어주곤 했다.
문장을 바로잡기 위해 전편을 다시 읽어보니,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이 판화처럼 곳곳에 남아 있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전이었으므로 서로 지극히 몸을 움직여야만 가까스로 마음의 주고받음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중편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과 「지나가는 자의 초상」이 어쩔 수 없이 더 마음에 남는다. 왜냐하면, 사막이 그리우면 결국 사막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때의 간절함과 간곡함을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_개정판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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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배암에 물린 자국 _007
신라의 푸른 길 _035
남쪽 계단을 보라 _069
지나가는 자의 초상 _101
가족사진첩 _177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_221
새무덤 _255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_287
해설|정혜경(문학평론가)
사막과 바다의 접경을 보았던가 _357
작가의 말 _377
개정판 작가의 말 _380
■ 윤대녕 |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단국대 불문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은어낚시통신』『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누가 걸어간다』『제비를 기르다』『대설주의보』『도자기 박물관』,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추억의 아주 먼 곳』『달의 지평선』『미란』『눈의 여행자』『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여행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음식기행문 『어머니의 수저』,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초판 발행 | 2013년 8월 16일
* 128×188 | 384쪽 | 값 13,000원
* ISBN 978-89-546-2093-2 03810
* 책임편집 황예인(031-955-2657)